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compassion(긍휼)은 라틴어 ‘com’(함께)과 ‘passio’(고난당하다)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즉 ‘함께 고난당한다’는 뜻입니다. 긍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라쿰’도 동일합니다. 라쿰은 ‘자궁’(레켐)이란 단어에서 온 말로 어머니가 뱃속 아기와 함께하듯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함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긍휼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으십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고통과 아픔에 무심하거나 무지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개인과 공동체의 실존을 ‘배’로 표현합니다.
배가 풍랑을 만나듯 나와 우리 공동체의 삶과 사역에는 실존을 흔들 만한 사건들이 발생합니다(마 14:24). 난파의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한복판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은 당신의 쉼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마 11:28-30). ‘멍에도 주와 함께, 쉼도 주와 함께’하는 삶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다’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함께 아파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시기에 앞서 동시에 먼저 나의 아픔에 공감해 주십니다. 내 아픔 그대로를 느끼시는 긍휼하신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십자가에서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이로써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긍휼’히 여길 때, 즉 그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공감할 때, 우리는 참 생명과 참된 쉼을 전하게 됩니다. 잠시의 떡과 음료와 위로뿐 아니라 영원한 양식이요 영원한 생명이요 영원한 쉼의 근원인 예수를 전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공감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잇대어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나와 함께 멍에를 지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감당할 수 없던 나의 십자가가 가벼워지고, 비로소 쉼을 누리게 됩니다.
나는 예수님의 긍휼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❶ 예수님이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심을 깨닫습니까?
❷ 예수님의 초대에 기쁨으로 응하고 있습니까?
compassion(긍휼)은 라틴어 ‘com’(함께)과 ‘passio’(고난당하다)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즉 ‘함께 고난당한다’는 뜻입니다.
❶ 관련설교 – 2022 예수의 길 4. 대가 – 너희 십자가를 지라
긍휼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와 함께 고난당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은 우리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나의 고난이든 세상의 누구의 고난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에서 긍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라쿰’(rachuwm)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자궁’을 뜻하는 ‘레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태아의 고난까지도 함께 겪으시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고난을 품고 아파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도 누군가의 고난을 볼 때 긍휼히 여기도록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고난과 아픔을 보기 시작할 때, 그들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시는 주님의 긍휼을 보게 됩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다’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함께 아파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시기에 앞서 동시에 먼저 나의 아픔에 공감해 주십니다. 내 아픔 그대로를 느끼시는 긍휼하신 주님이십니다.
❷ 관련설교 – 2022 예수의 길 4. 대가 – 너희 십자가를 지라
우리 인간 실존의 문제는 바로 이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것이죠. 사실 오늘 말씀의 본문은 그러한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한 가장 적절한 답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하지만 이 부르심은 단순한 쉼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쉼이며, 자신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는 삶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이 길을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셨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 7장 11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 장례를 치루는 장면을 보시고 가슴이 미어지듯 아파하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으로 인해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즉, 그분의 긍휼이 생명을 살리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나인성 과부 사건의 중요점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의 고통을 당신의 아픔처럼 느끼셨다는 점입니다. 그 여인의 고난에 연합하셨기 때문에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십자가에서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이로써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열어 주셨습니다.
❸ 관련설교 – 2022 예수의 길 4. 대가 – 너희 십자가를 지라
주님께서 우리를 십자가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놀라운 신비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짐과 십자가, 그리고 고뇌를 없애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지고 있는 것들을 그분의 것과 연결하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라는 초대는 아마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심오한 차원의 부름일 것이다. 긍휼이란 주님만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분과 함께 고난당하도록 초대받았다는 뜻이다.” 헨리 나우웬, 『예수의 길』
십자가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이 사실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와 무거운 짐으로 힘겨워할 때마다, 그 고난으로 몸부림치며 아파하셨던 주님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고난을 묵상하며 우리의 짐이 가벼워짐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우리의 고난을 대신 감당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❹ 관련예화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맥스 루케이도, 아드폰테스, 13.01.25)
“피 흘림으로 얻으신 구원”
성경을 대충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와 용서의 특별한 관계를 눈치챘을 것이다. 먼 옛날 아담의 아들 때부터 예배자들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히브리서 9:22)는 것을 알았다.
그 선례를 따른 자들이 그 뒤로 줄줄이 있다. 아브라함, 모세, 기드온, 삼손, 사울, 다윗……. 죄 용서에는 피 흘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야곱도 알았다. 그래서 돌로 단을 쌓았다. 솔로몬도 알았다. 그래서 성전을 지었다. 아론도 알았다. 그래서 제사장직이 시작됐다. 학개와 스가랴도 알았다. 그래서 성전을 재건했다.
그러나 그 줄은 십자가에서 마침내 끝난다. 아벨이 밭에서 이루려 했던 일을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해 마치셨다. 아벨이 시작한 일을 그리스도가 완성하셨다. 예수님이 제물로 드려진 후로 더 이상 제사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히브리서 9:11, 현대인)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제물로 드려진 후로 더 이상 피 흘림이 필요 없다. “그리고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기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획득하셨습니다”(히브리서 9:12, 현대인).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고 십자가는 제단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었다”(히브리서 10:10).
갚아야 할 죗값을 그분이 갚으셨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분이 하셨다. 무죄한 피가 필요했다. 무죄한 피가 바쳐졌다. 단번에 영원히. 이 두 단어를 당신의 심장에 깊이 새겨두라.
❺ 관련예화 (『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 팀 켈러, 두란노, 13.02.18)
“그 분의 어두움을 통해 우리는 빛으로 나아간다”
기독교는 하나님 자신이 고통 가운데 울부짖으셨다고 말하는 유일한 종교다. 그런데 하나님의 고난이 무슨 소용인가? 십자가 곁에 섰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무의미하게만 보였다. 아무리 봐도 일말의 유익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이 얼마나 귀한지를 깨달았다. 십자가 앞에서 그들은 사랑과 권능, 정의의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가장 위대한 역사를 목격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천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아 돌아가셨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보다 더 확실히 증명할 수 있을까?
고난은 ‘인간’을 완전한 어둠으로 내몰곤 한다. 대개 우리는 자신이 고난 받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예수님의 고난이 제자들에게 무의미해 보였던 것처럼 우리의 고난도 부당하게만 보인다. 하지만 십자가는 고난의 이유가 ‘아닌’ 것을 밝혀 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관해 아무런 계획도 없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은 절대 아니다. 예수님이 버림을 받고 우리의 죗값을 치르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 버리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신다는 증거다. 또한 십자가는 아무런 까닭 없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을 당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하지만 살 수 없었던 삶을 사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절대 순종의 본을 보이셨다. 당신이 누군지는 상관없다. 백부장, 매춘부, 암살자, 목사, 누구든 상관없다.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장벽이 사라졌다. 이제 누구든 용서와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당신을 향한 무한한 사랑 탓에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잃어버리신 예수님, 그분을 보면 당신의 무정한 마음이 녹아내릴 것이다. 당신이 누구든 눈이 열리고 어둠이 물러가는 경험을 하게 되리라. 마약처럼 당신을 지배해 오던 것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던 것들로부터 마침내 해방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어둠은 우리 자신의 어둠을 파괴하고 흩어 버리는 능력이 있다. 그분의 어둠을 통해 우리는 무정과 어둠과 죽음에서 벗어나 다정과 빛과 생명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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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사람은 어떤 심정일까?
절규와 처절한 죽음의 고난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참한 슬픈 긍휼의 마음일 것 같습니다. 온 몸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려 피눈물이 쏟아져 나에게 튀어 나오는 것을 본다면 아픔과 고통이 얼마나 비통한 통곡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죄악을 생각하게 합니다. 죄악이 녹아내리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무거운가 생각하게 됩니다. 주홍 같은 보혈의 피가 흘려 내리면 무거운 죄가 없어져 가벼우니 한 숨을 쉴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치욕적인 모욕이고 인간성을 짓밟는 더 이상 모욕적일 수 없는 일을 예수님께서 당하시는 것입니다. 비인간적인 형벌로 그런 십자가에 달리는 것 자체가 가장 비천한 모습니다.
2.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예수께서 죽으셔야 했던 사건은 무슨 이유인가?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고통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어지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속죄양이 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것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는 순간에도 한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입니다. 긍휼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으십니다. 멍에도 주와 함께 쉼도 주와 함께하는 삶입니다. 나와 함께 멍에를 지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감당할 수 없던 나의 십자가가 가벼워지고 비로소 쉼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십자가에서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이로서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여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원 구원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살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하나님만 함께 해주신다면 천국은 물론 따논 당상이고 이 땅에서의 삶이 형통함을 믿습니다.
그런 복을 받는 길도 친절하게 성경에 그렇게 써놓으셨는데 오늘은 고통도 함께 공감해주시는 긍휼의 하나님까지 선물 받습니다.
자녀들을 키우면서도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인지 스킨십을 잘 해주지 않는 스타일의 엄마였습니다.
오늘 청소년부 예배를 좀 색다르게 드리느라 입구에서 학생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많은 학생들 중 우리 반 아이들은 유난히 눈에 띄고 두팔 벌려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팔벌려 환영하는 나를 보며 같은 모습으로 안긴 학생이 있었는데 나자신이 신기했습니다.
내 새끼도 잘 안아주지 않던 내가 맡겨진 아이들을 안고 있으니 선생님같았습니다.
하나님도 나를 늘 두 팔 벌려 환영하시며 아픔을 공감하시며 꼭 안아주십니다.
받은 사랑, 받은 공감, 받은 은혜~~
주님의 마음 있는 곳으로 흘러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