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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을 갈고 씨를 뿌리다

3월 17일 예수님처럼 온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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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5; 10: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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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온유는 침묵이나 외면이 아닙니다.

불의와 부정 같은 불편한 것에 눈감는 도덕적인 무관심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위해 물러서는 것이나 비겁함도 온유가 아닙니다. 존 맥아더는 온유에 대해 ‘부드러움, 억제된 성품일 뿐 연약함이나 무기력이 아니다. 이는 제어된 힘이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묵상했습니다. 온유는 고난과 억압 앞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힘>으로 대응하고 싶은 내 의지를 내려놓고, 침묵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침묵>하며 외면하고 싶은 내 의지를 내려놓고, 불의한 것에 맞서 직언해야 합니다. 진정한 온유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온유하신 예수님은 여러 차례 노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악한 의도로 예수님을 주시하던 자들을 향해(막 3:4), 율법으로 의무를 피하려는 자들을 향해(막 7:13-14), 어린아이들을 막아선 제자들을 향해 노하며 꾸짖고 책망하셨습니다(막 10:14). 예수님의 분노는 즉흥적이거나 충동적이거나 감정적인 배출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권위 있는 표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로 인해 불이익과 미움 당함과 육신의 피로를 감수하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셨고, 고통과 희생을 감당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들은 무엇에 분노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분노하신 것에 분노해야 합니다. 불의와 부정, 생명을 경시하면서도 법적 정당성을 찾아 악을 무마하려는 사안들에 분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병자들, 세리, 죄인들에게까지 늘 곁을 내어 주셨습니다. 나의 삶, 우리의 신앙공동체 안에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자리가 넉넉히 준비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온유할 때 갈등과 불이익, 불화와 미움 당함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그럼에도 온유한 자는 멍에를 매고 예수님을 배웁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시선과 눈물이 있는 곳을 향합니다.


나는 예수님처럼 온유한 사람입니까?

❶ 침묵할 것에 침묵하며 분노할 것에 분노하고 있습니까?

❷ 온유함으로 인해 짊어져야 할 멍에와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묵상 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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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이라면, <힘>으로 대응하고 싶은 내 의지를 내려놓고, 침묵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침묵>하며 외면하고 싶은 내 의지를 내려놓고, 불의한 것에 맞서 직언해야 합니다. 진정한 온유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❶ 관련 설교 – 2020. 4. 온유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다 

군목시절 대전통합병원에서 근무하며 조치원에 살 때의 일입니다. 

장이 열리는 날이면 아이들 손을 잡고 구경도 하고, 떡볶이도 사먹고, 순대도 사먹고, 사람 부대끼는 것이 좋아서 장에 가곤 했습니다. 장이 서는 날이면 어디나 그렇듯이 복잡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장 한 복판에 복잡한 길을 가고 있던 중, 뒤에서 차가 빵빵거리는 소리가 거슬리게 들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는 이 길은 차들이 다닐 수 있는 곳도 그런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저에게는 퍽 짜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게다가 육군 장교였던 저는 참지 못하고 뒤를 향해 한 마디 하고 말았습니다. 

제 속에 있는 의협심은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죠. 

“당신 뭐야! 여기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왜 그래!” 라며 운전자를 쳐다보는 순간 저는 후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의 몸 전체가 문신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눈빛 역시 예사롭지 않은 험악함이 있었기 때문이죠. 찰나의 순간에 갈등이 일어나더군요. 그리고 저는 어쩔 수 없이 온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이것도 온유함일까요?  

 

 

예수님의 분노는 즉흥적이거나 충동적이거나 감정적인 배출이 아니었습니다. 

➋ 관련 설교 – 2020. 4. 온유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다 

내가 몇 년 전 새벽기도를 다닐 때의 일이였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집에 식빵이 필요하다는 것이 생각나서 동네 일찍 문을 연 빵집에 들려 식빵을 사려고 했다.  

그런데 그 빵집에 혼자 있던 직원이 아직 계산하는 사람이 안 나와 빵을 팔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식빵은 아침에 만든 것도 아니고, 전날 팔고 남은 식빵이었는데 급한 김에 그 하루 지난 빵이라도 사려 한 것인데, 계산원이 없다는 이유로 빵을 살려면 다시 오든지, 아니면 기다리라고 하는 말에 화가 났다. 직원이 출근하는 시간을 맞추려면 2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아니 고작 3000원 밖에 하지 않는 식빵 하나 사는 건데, 그것도 현금을 주고 오겠다는데 같은 직원이면서 기다렸다가 그 돈을 계산하는 직원에게 전해 주는 것이 무엇이 어렵다고 이렇게 고객을 힘들게 하지?’ 하는 생각에 그 직원에게 호통을 쳤다. 

“하루 지난 식빵을 급해서 사겠다는데, 같은 직원이면서 식빵 값 3000원을 전해 주지 못하겠다는 것은 고객을 그 시간까지 기다리게 하는 아주 나쁜 횡포예요! 그냥 두고 볼 수 없으니 사장에게 일러 바로 잡아야겠어요, 이름이 어떻게 되죠?” 하면서 화를 마구 내었다.  

직원은 끝까지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나는 씩씩거리며 집에 갔다가 9시가 넘어 다시 빵집에 가서 사장을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빵집 사장은 이야기를 다 공손하게 듣고선 얼마나 마음이 상했냐면서 아침 일찍부터 찾아오신 고객에게 응대가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르바이트생에게 일러 주었다며 마음을 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뭔가 얼떨떨한 기분이 들던 중에 빵집 사장은 아침에 갓 구운 빵이라면서 서비스로 얹어 주고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고 손님을 기억하니 앞으로 더 잘 챙겨 드리겠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빵집 사장에게 인사를 받으며 빵을 들고 나오는데 기분이 묘했다.  

 

분명히 옳은 일이라고 당당히 따지려 했는데, 이미 알고 있던 사장이 자신의 그 긴 불평을 다 들어주고, 낮은 자세로 직원의 실수라면서 빵까지 챙겨주니 딱히 할 말은 없었던 것이다.  

그 때, 빵집 사장의 목에 걸린 십자가가 기억났다. ‘그래 십자가는 저렇게 행동하는 사람에게 있을 때 더 빛이 나는 거야. 그런데 나는 새벽에 가서 무엇을 기도하고 왔지?’ 하는 생각에 많이 부끄러웠다. 

 

 

예수님처럼 온유할 때 갈등과 불이익, 불화와 미움 당함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그럼에도 온유한 자는 멍에를 매고 예수님을 배웁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시선과 눈물이 있는 곳을 향합니다. 

➌ 관련 설교 – 2020. 4. 온유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다 

사실 온유하다는 말 속에는 “내가 피곤하고 힘들다!”는 현실이 따라 오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소외당한 어린이, 무가치한 것 같은 어린이가 참으로 귀하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그리고 교회가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무리일까요? 

진정한 교회의 영성이 살아있는 곳에는 과부와 소외된 자, 그리고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이 서야할 자리가 넉넉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과부와 세리들, 심지어 죄인들까지 늘 함께 있었던 이유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 때문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특별한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이 특별하게 대우를 받는 곳이 아니라,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이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 가치에서 돈의 문제가 기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니고데모와 삭개오,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던 부자 청년도 불쌍히 여기시고 함께하셨습니다.  

 

누구에게 공이 돌아가는가를 상관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일을 굉장히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를 위해서 노력했던 일이 다른 사람의 손에서 번창하고, 자기가 뿌린 씨를 다른 사람이 거두는 것을 기꺼이 볼 수 있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 우리가 배웠던 아브라함 링컨은 참 존경받을 만한 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그가 정치를 하고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자신을 힘들게 하는 많은 이들과 함께 일을 했다는 것이죠. 누군가 그의 위대함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온유는 자기의 욕심을 버릴 때 나오는 행동이요, 자기의 십자가를 지면서 나오는 행동이요, 자기를 희생하는 행동이기에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온유가 약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온유’ 에 대한 단어적 고찰 

❹ 국민일보 [오늘의 설교] 온유한 사람 (2019.02.25.) 중에서 

링크 : https://m.kmib.co.kr/view.asp?arcid=0924063390 

본문에 나오는 ‘온유’의 뜻이 무엇일까요. 온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라우스’(형용사)와 ‘프라우테스’(명사)가 있습니다. 의외로 이 말의 기원은 야생동물의 성품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미국 서부의 농장주들은 말을 듣지 않는 사나운 야생마를 길들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선 초원으로 데리고 가 작은 당나귀와 함께 묶은 뒤 풀어 줍니다. 그러면 야생마는 이리저리 뛰어오르면서 힘없는 당나귀를 끌고 지평선 너머로 유유히 사라집니다. 며칠이 지나면 야생마와 당나귀가 돌아옵니다. 당나귀를 떼어놓기 위해 날뛰던 야생마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매달려 있는 당나귀를 포기하고 결국 지쳐 얌전해집니다.

온유란 결국 거칠고 난폭한 성품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변하는 걸 의미합니다. 야성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완벽하게 길든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무엇보다 강한 야성이 주인만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뛰라고 박차를 가하면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장이라도 달려갑니다. 반대로 아무리 더 달리고 싶어도 주인이 고삐를 당겨 서라고 하면 그 자리에 멈춥니다. 온유함은 철저하게 주인을 위한 성품이기 때문에 산들바람처럼 부드럽지만 태풍처럼 거세게 몰아칠 때도 있습니다. 

 

❺ 관련 설교 – 2007 성령의 열매(변화산 시리즈) 성령의 9가지 열매 5 – 온유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인 “온유”의 정의를 먼저 내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온유”라는 뜻의 헬라어 ‘프라우테스’는 따뜻함 혹은 ‘부드러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드러움이 유약한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집을 꺾고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예를 든다면, 고대 중동지방에서 사나운 들짐승이 가축으로 자라 그 성질이 길들여진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가 가진 가장 중요한 핵심의미는 ‘잘 다스려졌다’는 뜻입니다.  

‘온유’함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하며 유익한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유익은 “사람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화를 내거나 ‘아니오’라고 하기 보다는 긍정적이고, 수용적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배려합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러분들의 말을 잘 따라 주었던, 거절하지 않았던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까? 

어떤 분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아내의 말을 절대로 거절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아내는 나와 살아오는 동안 늘 나에게 순종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누군가에게 늘 내 의지를 꺾고, 내 고집을 꺾고 지는 것 같았지만, 그 부드러움과 온유함이 자라나 열매를 맺을 때 얼마나 풍성한 일들이 나에게서 일어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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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진
#2.
<온유와 갈등의 상관관계>
살아가면서 당연히 갈등이 있다는 건 알지만요
웬만하면 사람들과의 갈등이 생기는 걸 피하려고 합니다

일 때문에 갈등이 생기려고 하면?
갈등이 싫어서 제가 일을 더 한다고 한 적도 있습니다

“그걸 네가 왜 하냐?”라고 하시는 분도 있었는데요

“일은 더 해도 잠을 푹 잘 수 있다
갈등이 생기면 골치 아파서 밤에 잠도 잘 못 자겠더라
일 많이 하는 것보다 서로 싸우는 게 더 괴롭다”답하기도 했습니다

갈등은 딱 질색인데요
오늘 묵상집에서는 온유할 때 갈등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온유할 때 갈등과 불이익, 불화와 미움 당함이 있을 것입니다(91쪽)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온유하신 예수님이야말로 갈등을 일으키는 아이콘(?)이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4,36)
Do not suppose that I have come to bring peace to the earth.
I did not come to bring peace, but a sword.
a man's enemies will be the members of his own household.'

예수님은 자기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게 할 정도로
a man's enemies will be the members of his own household
집안에서도 불화를 일으키셨습니다

주님! 저는 그동안 온유함을 부드러움, 갈등이 없는 상태,
싸움의 여지가 없는 성격이라고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불의 앞에선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된다고 해도!
갈등이 있는 상태로 가야 온유한 자임을 깨닫습니다

갈등을 무조건 싫어했던 제 생각을 내려놓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이 집안 식구들조차 원수가 되는 갈등을 일으키면서라도
불의에 대응하셨듯이요
저도 갈등의 아이콘이 되어서라도 불의에 대응하는 용기를 주세요

예수님이 원하시는 갈등을 일으키는! 온유한 자가 되게 인도해주세요
2023.03.17
이명진
#1.
<사회적 약자를 위해 분노하는 것이 온유>
올해 세상이 보기에 더 좋은 조건을 포기하고 좋지 않은 것을 택했습니다
더 낮아지고 더 고생하는 편을 선택했습니다

놀라운 건 더 낮아진 자리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뜨거운 낮 시간에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듯이...
예수님이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명진아, 난 편하고 화려한 삶이 아니라
여기 낮은 곳에 있어! 네가 낮은 곳을 택할 때마다 날 만날 거야”
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경험하고 만나서 눈물을 한 바가지 흘렸습니다
더 고생하며 더 낮아지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경험했습니다

묵상집에서는 온유함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분노하는 것임을 설명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자리가 있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 세리, 죄인들에게까지 늘 곁을 내어 주셨습니다
나의 삶, 우리의 신앙 공동체 안에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자리가 넉넉히
준비되어 있습니까?(91쪽)

제가 세상적으로 낮아졌을 때 예수님을 더 경험해선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자리=예수님을 위한 자리,로 읽혔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인 아이들을 위해 분노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10:14)
When Jesus saw this, he was indignant. He said to them,
"Let the little children come to me, and do not hinder them, for the kingdom of God belongs to such as these.”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걸 막았을 때?
예수님께서 노하셨다he was indignant고 쓰여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병자의 편이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노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3:5)
He looked around at them in anger and, deeply distressed at their stubborn hearts, said to the man, "Stretch out your hand."
He stretched it out, and his hand was completely restored.

성경은 예수님께서 분노하심으로 그들을 봤다
He looked around at them in anger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예수님께서 직접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자=예수님=예수님이 분노하시는 것에 분노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예수님은 아이들, 병자...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분노했습니다
제가 약자들을 위해 분노할 때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낮은 자리에 갈 때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하신 하나님!

저 자신을 위해 분노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분노하게 도와주세요
2023.03.17
김은실
온유는 억제된 성품, 제어된 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인데 너무나 쉽게 감정을 쏟아놓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는데 입술을 제어하고 마음을 지키는 일이 가장 어렵습니다.
불평,불만,원망을 생각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흘리는 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감사의 고백, 기쁨의 찬송이 나올 구멍이 없습니다.
감사도 습관인데 더 나쁜 습관이 이미 체휼화 되어 있어서 온유한 성품은 내 안에 자리할 공간이 없습니다.

[온유는 고난과 억압 앞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힘>으로 대응하고 싶은 내 의지를 내려놓고, 침묵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침묵>하며 외면하고 싶은 내 의지를 내려놓고, 불의한 것에 맞서 직언해야 합니다. 진정한 온유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 앞에서 자신을 비우는 인생이고 싶습니다.
내 힘으로는 금방 바닥이 드러납니다.
거룩하신 성령님~~
나를 떠나지 마시고 통치하소서.
202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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