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별된 삶과 태도를 요구하십니다. 다윗은 근본적인 죄성을 발견하고, 근원적인 변화를 간청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의식과 의지의 전환만으로는 우리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주체가 완전히 바뀌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새로운 피조물로 빚으실 때, 우리 언어와 행동, 의식과 삶 전체가 변화됩니다.
팔복은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들을 무척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지금껏 살아온 삶이나 바람들과 예수님의 말씀이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팔복에 관한 말씀은 다른 가치, 즉 ‘하나님 나라’ 복음의 시작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가 복이 있다’ (Blessed are-)고 말씀하시지만, 세상 관점에서는 전혀 복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자들에게는 진정한 복입니다.
당시 제국에서 통용되던 ‘관용’의 개념은 ‘주고받는 것’이었습니다.
관용의 라틴어 어원은 ‘리베랄리타스’(liberalitas)입니다. 당시 ‘나눔’은 언젠가 보답할 수 있는 사람에게 먼저 무언가를 주는 행위를 뜻했습니다. 후하게 베푸는 이유는 후하게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고아나 과부나 가난한 자들은 나눔과 관용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국의 상식을 뒤엎고 다른 나라, 다른 가치를 선포하십니다. 보답할 수 없는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고, 원수도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베풀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통념인 리베랄리타스 앞에 새로운 가치를 제시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6-48).
나는 어느 나라에 더 가깝습니까?
❶ 세상의 통념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 중 어디입니까?
❷ 내가 생각하는 복은 무엇입니까?
의식과 의지의 전환만으로는 우리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주체가 완전히 바뀌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새로운 피조물로 빚으실 때, 우리 언어와 행동, 의식과 삶 전체가 변화됩니다.
❶ 관련설교 ➀ 2020 산상수훈-생각을 바꾸라 하시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말씀하신 것 중 분명한 것은, 우리들에게 세상과 다른 태도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 내 안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함이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영, 정직한 영, 의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팔복’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떠나 제자들을 보시고 하셨던 말씀입니다.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누구나 따를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는 기억하고 따라야 하는 말씀입니다. 삶의 의식과 태도를 바꾸어 놓는 이야기,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과는 다른 의미가 있는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도도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방관자가 아닌, 하나님이 이끄시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우리가 바꾸어야 하는 생각과 태도들이 있습니다. 바뀐 생각이 바뀐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죠. 하나님의 생각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팔복에 관한 말씀은 다른 가치, 즉 ‘하나님 나라’ 복음의 시작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가 복이 있다’(Blessed are-)고 말씀하시지만, 세상 관점에서는 전혀 복이 아닙니다.
❷ 관련설교 ➁ 2020 산상수훈-생각을 바꾸라 하시네
팔복말씀은 예수를 믿겠다고 나온 사람들을 무척 당황스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의 바람과 나아온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한 예수님의 바람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팔복 말씀은 ‘다른 가치’ 즉 ‘하늘나라 복음’의 시작점이 되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의 불특정 다수를 향한 말씀이 아니라, 적어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인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국의 상식을 뒤엎고 다른 나라, 다른 가치를 선포하십니다. 보답할 수 없는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고, 원수도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베풀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❸ 관련설교 ➂ 2020 산상수훈-생각을 바꾸라 하시네
예수님 당시의 그리스와 로마시대에는 ‘리베랄리타스 (liberalitas)’라는 인간관계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단어는 보답을 받기 위해 뭔가를 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에서 유통되던 주화에서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리베랄리타스’의 사회에서는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나눔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뭔가 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먼저 무언가를 해줌으로써 은혜의 빚을 지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후하게 베푸는 이유는 단 하나 후하게 받기 위함입니다. 당연히 ‘나눔’이란 나중에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죠. 그 결과 가장 많이 주는 사람이 가장 많이 받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니 고아와 과부가 도움을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고, 이들은 점점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 문화의 한 복판에서 예수님은 ‘다른 나라’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복’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세상이 주장하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나라에서는 내놓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뻗습니다. 그 분의 나라에서는 심지어 원수도 사랑합니다. 당연히 원수는 보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것의 상이 크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상이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전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인들도 자기를 잘 대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들도 보답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선대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던 통념 ‘리베랄리타스’일 뿐입니다.
❹ 관련예화 (『이렇게 복 되어라』 이동원, 나침반, 98.05.01)
“축복이 되는 존재”
앞을 못 보는 맹인 한 분이 매일 황혼 무렵이 되면 늘 등을 가지고 마을의 거리로 나섰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은 앞을 보지 못하는데 왜 등을 가지고 나가십니까?”하면 그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동네 사람들이 이 빛을 보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우리는 복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봤습니다. 복된 사람의 인격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 복된 사람이 미칠 수 있는 영향, 즉 그들의 기능에 대해서 계속 가르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원문에서 강조된 단어는 ‘너희’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들이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있음으로 세상이 경험할 수 있는 축복, 즉 그리스도인의 ‘축복된 존재로서의 역할’에 대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기능적 정의, 즉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여야 하는가를 계속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존재해야 할 이 세상은 부패해 가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어두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부패가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소금인 그리스도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어둡기 때문에 빛이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있는 세상이 아닙니까? 부패가 있는 곳에, 부패의 가능성이 있는 곳에 소금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어두운 곳에 빛은 얼마나 긴요합니까?
- 댓글을 통한 금전요구는 사기성 스팸입니다.

생각을 바꾸라 하시네
생각을 바꾸라는 것은 어떤 무엇인가의 생각을 어떤 무엇으로 어떻게 바꾸는가?
믿음으로 사회 통념상의 가치를 하나님의 영의 진리의 말씀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생각이란 어떤 일에 대해 머릿속으로 헤아리고 어떻게 하기로 정하는 것을 생각이라 한다.
즉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입니다.
우리의 사고와 생각의 영감을 하나님의 생각의 영감으로 깊은 울림과 탁월한 통찰로 복의 근원이며 생명의 말씀으로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즉 육신의 생각인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본성이 지향하는 죄로 인하여 죽은 성향을
생명인 영의 생각으로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받아 생명의 복으로 바꾸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성령께서 새로운 피조물로 빚으실 때 우리 언어와 행동, 의식과 삶 전체가 변화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팔복에 관한 말씀은 다른 가치, 즉 하나님 나라 복음의 시작점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자에게는 진정한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상식을 뒤엎고 다른 나라, 다른 가치를 선포하십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던 관용의 개념을 하나님의 말씀의 관용의 개념으로 바꾸어 보답할 수 없는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고 원수도 사랑하라 명하십니다. 우리가 베풀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육적인 생각을 영적인 생각으로 변화시킵니다. 즉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통념인 리베랄리타스 앞에 새로운 가치를 제시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6-48)
그리하여 사회 통념을 깨고 하나님의 진리의 영 생명의 말씀으로 복된 삶이 될 줄 믿습니다.
나의 육적 통념의 생각을 하나님의 영적 생명의 생각으로 바꾸어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후하게 받기 위해서 봉사하지 말자>
개인적으로 히스기야의 기도를 좋아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 덮어놓고 기도하지 않고요
열왕기하 20장에 나오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펼쳐 놓고 똑같이 기도하곤 합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왕하20:3)
“Remember, O LORD, how I have walked before you faithfully
and with wholehearted devotion and have done what is good in your eyes.”
And Hezekiah wept bitterly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려 위처럼 기도할 때?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왕하20:4)!
이사야를 히스기야에게 돌려보내셨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왕하20:5)”
하시며 히스기야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저도 이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제가 찬양팀, 리더로 봉사한 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 노력이 아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한 거라서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지만요
하나님은 공짜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제가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히스기야처럼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봉사한 거라고 고백하는데요
결론은? 이렇게 봉사해서 선하게 행했으니 대가를 달라..입니다
오늘 묵상집에서는 관용의 개념에 대해 설명합니다
-당시 제국에서 통용되던 ‘관용’의 개념은 ‘주고받는 것’이었습니다.
관용의 라틴어 어원은 ‘리베랄리타스’(liberalitas)입니다.
당시 ‘나눔’은 언젠가 보답할 수 있는 사람에게 먼저 무언가를 주는 행위를 뜻했습니다.
후하게 베푸는 이유는 후하게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고아나 과부나 가난한 자들은 나눔과 관용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보답할 수 없는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고,
원수도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85쪽)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리베랄리타스’의 의미로 구했구나..찔렸습니다
제가 봉사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후하게 받기 위해서,
마치 주고받으려는 마음은 아닌지, 돌아봤습니다
예수님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고아, 과부에게 주길 원하셨습니다
동일하게 제가 하나님께 봉사를 할 때도 후하게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하길 원하실 것 같습니다
봉사를 해서 저는 이미 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상을 받았습니다
주님! 히스기야의 기도를 기억하는 건 좋은데요
치사하게 제가 봉사한 내역서 들이밀며
제가 드렸으니, 하나님도 주세요,라고 기도했어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주고 받다’를 의미하는
‘리베랄리타스’(liberalitas)란 단어가 끼어들어 있었어요
그동안 히스기야의 기도를 따라한답시고,
봉사한 대가를 요구해서 죄송해요
사랑하는 하나님!
하나님께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봉사할게요
받은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받은 사랑이 너무 고마워서... 단순히 고마운 마음으로 봉사할게요!
신혼 때부터 아이들 5~6년 키울 때까지 서로 의지하며 공감하며 살았기에 각지로 흩어져 살면서도 일년이면 서너차례 만나는데 오늘은 참 불편하고 가슴 아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남편 못지않게 커리어우먼으로 수입 좋던 후배지만 후배같지 않은 포스로 돈냄새 풍기던 P씨가 자퇴와 가출과 방탕을 번갈아 하는 자식때문에 눈물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엔 그 후배가 관사아줌마들 부러움의 대상였고 남편들도 집에 있는 아내를 비교하던 그녀였습니다.
그 후배와 친한 나의 지인이 옆에서 지켜보면서 자녀양육을 무조건 물질적 보상으로 매번 타협하고 기준없이 엄마가 아이한테 끌려다녀서 불안하긴 했었다고 말하는데 오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세상적 통념과 세상이 말하는 복, 세상 가치~
친정부모님이 교회 다닌다고 들었는데 딸의 직업과 재력을 주인 삼아 딸집에서 손녀를 키워주시면서 신앙의 유산을 하찮게 여겨서 주께 붙들어놓지 못한 탓도 있지 않을까 씁쓸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팔복을 바로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세상과 다른 선택을 할 것입니다.
20년 전에 내 가치도 세상과 다를 바 없어서 그녀를 부러워하고 자녀교육과 남편 성공에 열을 올려 하늘 나라의 가치를 외면했었는데 오늘의 내가 하나님께 붙들려 말씀 안에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산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말씀하신 것 중 분명한 것은, 우리들에게 세상과 다른 태도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 내 안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함이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영, 정직한 영, 의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
늘 기억하며 세상 통념에 속지 않고 세상 가치를 부러워하지 않고 매일 의식을 전환하는 의지적 삶을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