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가난하고, 보지 못하고, 질병 가운데 사는 것은 비참하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더욱 비참한 것은 가난과 장애와 질병으로 인해 ‘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소녀를 향해 “달리다굼!” 하십니다(막 5:41). “일어나라. 고난을 딛고 일어서서 운명을 헤치고 나아가라!” 주님이 죽음과 흑암의 권세에 맞서라 명령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탄과 세상 권세에 구걸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를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눌림’을 양산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눌림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이기심, 자기중심주의가 만들어 낸 산물입니다. 인간은 사람과 상황, 시선과 평가, 죄와 어둠에 사로잡혀 불안해하며 낙심합니다. 이를 가장 잘 묘사한 것이 시편입니다. 시편 기자는 어둠 속에 울부짖습니다. 탄식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나락, 깊은 고통, 그곳에도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시인은 그곳에서 발견한 하나님으로 인해 다시금 소망하며 찬양하게 됩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택하신 백성이 왜 이토록 오랜 시간 고통당해야 하는지 항변했습니다(합 1:2-3). 하나님을 향한 울부짖음은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기 위해 더듬거리는 간절한 몸부림일지 모릅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만나 주시고, 건져 주십니다(시 23:4).
악이 존재하는 한, 억압과 눌림도 당연히 존재합니다.
믿음으로 자유를 선포해도 세상의 악은 사라지지 않고, 무서운 재앙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에 억눌릴 수도 있고, 고통에서 자유롭게 될 수도 있습니다. 눌린 자가 자유케 되는 것은 증오하거나 보복하거나 싸워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덕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는 예수님 덕분에 눌림에서 해방되었습니까?
❶ 나를 짓누르는 상황과 형편은 무엇입니까?
❷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도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사탄과 세상 권세에 구걸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를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❶ 관련 설교 – 2014 3. 대강절 – 눌린 자를 자유하게
마가복음 5장은 계속되는 치유의 기적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 마지막은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울고 통곡함을 보시고 행하신 일입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어 사람들이 다 울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39절부터 4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오늘 “눌린 자를 자유케”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저에게 떠오른 한 마디의 말이 있습니다.
“일어나라!”(달리다굼) 오늘도 예수님께서 자유의 복음을, 진리의 해를 선포하실 것입니다.
요즘 흔히 쓰는 말이 있습니다.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복음은 우리의 능력으로 결코 뛰어 넘을 수없는 벽을 넘어가게 합니다. 질병과 가난과 흑암의 권세에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달리다굼! ‘일어나라! 고난을 딛고 일어서서 운명을 헤치고 나가라!’
죽음의 흑암권세를 향해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와 죽음에 대하여 부탁하거나 구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명령하는 사람들입니다.
눌림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이기심, 자기중심주의가 만들어 낸 산물입니다.
❷ 관련 설교 – 2014 3. 대강절 – 눌린 자를 자유하게
눌림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이기심과 자기중심주의가 만들어내는 일들입니다. 빛 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 이 세상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미생 신드롬”이라고 불릴 만큼 “미생” 이라는 드라마의 인기가 대단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미생이라는 말이 아직 살지 못한 것인지 죽지 못한 것인지, 한 계약직 사원의 처절한 몸부림이 많은 공감을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주인공 장그래와는 대비가 되는 모든 스펙을 갖춘 입사 동기 장백기도 처절한 몸부림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이죠.
세상의 구조 속에서 절대로 넘을 수없는 벽으로 인해 좌절하는 인간,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의 열심을 보면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의 열등감의 감옥…
그런데 그 드라마를 보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회적 구조악과 이기적인 제도 속에서 힘들어 하는 주인공 장그래를 정말로 생각하고 같이 아파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가도 별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조차도 시기하며 미워하기에 자신을 감옥에 가둬버린 사람이, 자신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내가 미워할 사람이 아니라, 품어주고 사랑해줘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만나 주시고, 건져 주십니다(시 23:4).
❸ 관련 설교 – 2014 3. 대강절 –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고통가운데 힘들어 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역사가운데 눌린 자였고 포로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택하여 주셨다고 믿는데, 너무나 오랜 세월을 억눌리며 살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1장 2절과 3절에서 민족이 당하는 아픔 가운데서 조금 더 직설적으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 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성경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억압과 불의한 폭력가운데서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설명을 구해야 합니다.
악이 존재하고 악한 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억압은 당연히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억압의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고 찬송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장 목가적으로 생각하는 시편 23편은 사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가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고백한 내용입니다.
눌린 자가 자유케 되는 것은 증오하거나 보복하거나 싸워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덕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❹ 관련 설교 – 2014 3. 대강절 – 눌린 자를 자유하게
사도바울이 약함을 강함이라고 고백했던 것, 예수님께서 칼과 권력을 가지고 궁궐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말 구유에서 태어나셔서 가장 약한 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셨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을 바꾸기를 원했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수없이 많은 ‘불의’가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일’을 꿈꾸었으나 ‘소중한 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 교회는 “사회적 복음”이나 “개인적 복음”이냐의 문제를 놓고 서로를 비난했던 것 같습니다.
개인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회적 복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개인이 변화되어도 사회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복음의 역사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 주변에 눌린 자들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것이죠.
더 이상 어떤 악한 영에 눌려 지내지 말라는 것이죠.
메스컴을 통해 익히 들어서 아시겠지만, 물티슈문제로 우리 교회 사업가인 몽드드 대표가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누군가의 음해였고 이제는 모든 것이 밝혀졌지만. . .
제일 힘들었던 일은 돈을 손해 보는 일이 아니었답니다. 묵묵히 반품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보내주며 견디고 있었는데, 어느 주일 많이 울었답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느 때보다 하나님과 가깝게 살려고 노력했고, 선교했고, 후원했고. . .
그런데 새아기 축복 때 부모들에게 몽드드 물휴지를 나눠줄 때 자신을 비난하고 믿지 못한다면 어떡하나. . .그날 참 많이 울었답니다.
“하나님! 제 인생에서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이 때, 왜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시나요?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똥 묻은 휴지를 보내서 반품을 해달라는 사람들, 세상의 비난을 어떻게 견디나요?”
그 때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답니다.
“아들아! 만일 네가 나와 가까이 있지 않을 때 이런 일을 당했다면 너는 나를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나와 가장 친밀한 때 이런 일을 당하며 나에게 기도하고 나와 함께하지 않니?”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가장 완벽한 물휴지를 만들도록 고민하고 개발하게 하신 하나님이 너무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 회사가 얼마나 회복됐고, 돈을 얼마나 버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어둠,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유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악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유함과 승리를 선포하는 것 말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영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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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속에서 인간을 사로잡는 권력, 성, 돈, 도박, 투기 등으로 정신 마음이 억눌려져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삽니다.
이런 다양한 사로잡힘 억눌림, 유혹과 미혹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시어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영을 보내사 사로잡히고 억눌리고 짓눌린 멍에가 풀리어 자유롭게 하십니다.
나의 탐심과 욕심 분노 등의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로 인해 매개체를 제거하지 않으면 피해를 보고 자유롭지 못하며 죄에 억눌려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이기심 자기중심주의가 만들어 낸 산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만나주시고 건져 주십니다.
믿음으로 자유를 얻는 것은 예수를 만난 덕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억눌린 죄를 사랑으로 용서 하시고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께 영광 돌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