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을까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이는 예수님의 ‘사명 선언문’입니다. 처절한 심판과 멸망의 한복판에 임했던 희망의 메시지(사 61:1-2)가 암울한 유대 땅에 다시 한번 울려 퍼졌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약속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마 1:21)이십니다.
예수님은 ‘포로 된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무언가에 사로잡혀 노예처럼 살아갑니다. 윤리와 도덕, 사람, 성공과 물질, 감정, 지식과 정보, 내가 만든 규칙들, 쾌락, 권력, 거짓 평화, 참소, 율법적 굴레들, 이를 통해 역사하 는 죄와 사망의 권세들…. 포로 됨의 근본은 결국 죄와 욕망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모든 죄와 사망과 억압의 사슬을 푸셨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비진리를 멸하실 것입니다. 비진리로 인해 억압되고 노예 된 모든 자를 자유하게 하실 것입니다(요 8:32).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렘 17:9).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사용해야 할 지정의를 정죄하고 죽이는 일에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셨습니다(롬 5:1). 죄의 종이었던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되었고(롬 8:15),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나는 예수님 덕분에 참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❶ 여전히 나를 사로잡아 종노릇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❷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자녀의 권세를 누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약속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마 1:21)이십니다.
❶ 관련 설교 – 2014 대강절 –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최종) 중
오늘 말씀에 누가복음 4장 16-17절은,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그렇게 이사야에서 예언된 부분을 예수님 스스로 읽으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가장 암울했던 유대 땅에서 이사야의 말씀이 전해졌고,
이제는 로마의 압제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만을 바라던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래 글귀가 좋은 예화가 될 듯합니다. (필립 얀시의 책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 중에서)
케빈 코스트너가 출연한 영화 [작은 전쟁]의 한 장면에서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상투적인 위로의 말이 나온다.
베트남 전쟁의 참전 용사였던 한 사람이 광산 사고를 당한 친구를 구하려다 죽었을 때 그의 아내가 아들을 위로하며 “하나님은 아빠를 그분의 곁에 두기 원하셨던 거야”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이가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맞아요, 하지만 내가 아빠를 더 원해요.”
이 아이의 엄마가 한 말보다 차라리 “이 망할 것, 사망아!”라고 말한 시카고 장례식장의 목사 같은 반응이 더 낫고, 신학적으로도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세상의 비극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나는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느끼실까”라고 생각해 본다.
포로 됨의 근본은 결국 죄와 욕망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모든 죄와 사망과 억압의 사슬을 푸셨습니다.
❷ 관련 설교 – 2014 대강절 –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최종) 중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4 가지 자유, “four essential human freedoms” 에 대하여 말을 했습니다.
1) 첫째는 언론 및 표현의 자유입니다.
2) 둘째는 신앙의 자유입니다. “freedom of every person to worship God.”
3) 셋째는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이것은 경제적 자유를 말합니다. “freedom from want”
사실 절대 빈곤에 빠진 사람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빵 하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잘 사는 나라는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부를 나누어야 합니다.
4) 넷째는 공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freedom from fear”
이것은 정치적 자유입니다. 정치적으로 한 번 잘못되면, 구조적인 악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억압의 문제가 영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이 모든 억압이 우리를 억누르는 욕망의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억압의 사슬을 푸셨습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가난은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욕심으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창세기 1장 27-28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 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을 예레미야 기자는 17장 9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는데 사용해야 할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변하여, 이제는 서로 미워하고, 서로 싸우고, 서로 죽이는 일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죄의 종이었던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되었고(롬 8:15),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❸ 관련 설교 – 2014 대강절 –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최종) 중
자유함은 하나님 형상의 회복입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모든 결박에서 풀려나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알고 있는 이야기리라 생각합니다.
어떠한 조류학자가 사람의 노래를 잘 따라 부르는 앵무새 새끼 한 마리를 새장에 넣어 놓고 말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습니다.
Good Morning. How are you? I love you. 등등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많이 배우고 난후에, 그 앵무새가 가장 먼저 한 말은
“Give me freedom.” 이었습니다.
주인이 앵무새를 아끼고, 먹을 것을 잘 주고, 사랑으로 키웠지만, 그러나 새가 가장 원했던 것은 새장에서 풀려나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일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에 보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입니다.
“모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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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약속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포로 됨의 근본은 결국 죄와 욕망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모든 죄와 사망과 억압의 사슬을 푸셨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예수님은 비 진리로 인해 억압되고 노예 된 모든 자를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포로 된 자를 해방시키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인간은 타락하여 하나님의 사랑, 이웃 사람에 사용해야 할 지정의를 정죄하고 죽이는 일에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종이었던 예수님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세상의 타락에 오염된 죄로 가두어 살아 포로가 된 죄의 노예로 살았던 삶을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이제 죄로부터 해방되어 포로 된 마음에 자유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한 십자가>
3일 전에 약속이 있었습니다
정자동에 가서 식사도 하고 율동공원에 가서 차도 마셨습니다
수다를 떨다보니 이혼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요... 무슨 이혼을 논하겠습니까
이혼의 ‘ㅇ’도 꺼낼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제가 ‘남자가 이렇게 바람을 피웠고..’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감정이입이 되었습니다
괜히 오바하며 흥분을 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바람 안 필 거라고 믿을 수 있어?
신뢰는 유리병과 같아! 깨지면 다시 붙이기 힘들어
이혼해야지”라는 식으로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묵상집을 읽으면서
‘와.. 내 얘기가 진짜 성경적이지 않았다’반성했습니다
신뢰가 무슨 유리병이며, 붙이기 힘듭니까.
아무리 세상이 그렇게 가치관을 주입해도
예수님이 화평, 신뢰를 회복하신 걸 경험한 저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셨습니다(78쪽)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justified through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예수님은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인간의 마음(렘17:9)도 회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마음도 보혈 앞에서 정결해지는데요
한 번쯤 깨진 신뢰는 예수님의 보혈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제 입을 조심해야겠어요
묵상집을 읽고 성경을 읽으면 뭐 하나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흥분합니다
예수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려 주셔서 감사해요
하나님과 묵상 글을 통해 대화하며 화평을 누리게 해주신 것도 감사해요
다음에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사는 자답게
말하게 도와주세요!
<글의 노예>
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핸드폰에 ‘밀리의 서재’라는 어플을 매달 구독료를 내고 이용 중입니다
지금은 어플을 통해 문학상 수상작인 ‘식스팩’이란 소설을 읽고 있습니다
시간이 붕 뜨면? 어플을 켜서 읽다만 부분을 읽을 때도 있습니다
머리가 안 돌아가면 드라마를 한 편씩 봅니다
오늘도 드라마를 보면서 인상 깊은 대사를 수첩에 적어두었습니다
소설을 읽고, 드라마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요
글을 쓰는 것에도 집착합니다
요즘은 매일 인스타 스토리에 일과를 하나씩 적고 있습니다
아주 일거수일투족을 속속들이 올리고 있습니다
묵상집에서는 우리가 무언가에 사로잡혀 노예처럼 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결국 죄와 욕망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에 사로잡혀 노예처럼 살아갑니다
윤리와 도덕, 사람, 성공과 물질, 감정, 지식과 정보....(중략)....
포로 됨의 근본은 결국 죄와 욕망의 문제입니다(78쪽)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글에 집착해서 글의 노예처럼 산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글에 집착하고 있니?’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결국 저의 욕망입니다
저는 글이 제 미래의 삶을 훨씬 더 좋게,
훨씬 더 윤택하게 할 수 있다고 찰싹 같이 믿고 있습니다
제가 글의 노예가 되어 포로처럼 사는 건, 결국 저의 욕심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노예 된 자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It is for freedom that Christ has set us free. Stand firm, then,
and do not let yourselves be burdened again by a yoke of slavery
예수님께서 자유를 주셨습니다Christ has set us free
그런데 왜 저는 글에 집착하면서요
종의 멍에a yoke of slavery를 메고 있을까요.....
진리가 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진리가 우릴 자유롭게 한다고 하셨으니까요the truth will set you free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your word is truth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Sanctify them by the truth; your word is truth
예수님께서 이미 자유를 주셨다Christ has set us free고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예수님께서 자유를 주셨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확실히 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글에 집착해서 여전히 자유가 없는 노예의 삶을 살았던 걸 보면요
예수님께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확실히 믿길 원합니다
읽고 쓰는 것을 열심히 하되, 글에 집착하거나 글의 노예가 되지 않길 원합니다
성령님!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함을 누리며
글을 읽고 쓰는 일에 열심인 자가 되게 인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