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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생명으로

2월 28일 예배인가, 소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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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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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요즘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신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자신’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이 성경 두 권을 주문했습니다. 복음서를 펴서 예수님에 관한 구절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구절을 면도칼로 일일이 도려냈습니다. 그랬더니 원문의 10% 정도가 남았습니다. 제퍼슨은 자신의 민주주의 철학에 부합하는 예수님을 재탄생시켰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예수님은 묘하게도 제퍼슨을 닮아 있었습니다(스카이 제서니, 《종교에 죽고 예수와 살다》).

시편은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고백합니다.

다윗은 왕이신 하나님을 높이며 송축했습니다. 나의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고 있습니까? 간혹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예수님에 관해 말하고 있지만, 말하는 이와 닮은 예수님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객전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내 주장과 삶을 대변하기 위해 성경과 예수를 이용하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 ‘소비’입니다. 

‘소비자가 왕이다!’ 우리가 자주 듣는 말입니다.

소비자는 원하는 것을 얻을 권리가 있고, 이를 위해 돈을 지불합니다. 그런데 예배도 소비 행위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마치 ‘쇼핑’하듯 만족하는 교회, 만족하는 설교를 찾아 이곳저곳을 다닙니다. 시간과 물질을 투입구에 넣고 원하는 것을 눌러 얻는 자판기처럼 생각합니다. 이는 예배가 아니라 선택적 소비입니다. 예배자의 자세가 아니라 소비자 마인드입니다.

예배는 주의 이름을 ‘높이는(exalt)’ 것입니다.

exalt는 lift라는 단어보다는 훨씬 극적인 의미에서의 높임입니다. 흔히 ‘깃발을 든다’는 말처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든다는 뜻입니다. 예배란 그 중심에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 드러나기 위해 나의 이름, 나의 모든 것을 내리고, 가리고, 감추어야 합니다. 나의 의도와 욕망을 비우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야 합니다.


나는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소비하고 있습니까?

❶ 원하는 설교/예배/교회를 찾아 ‘쇼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❷ 자판기 앞의 소비자입니까, 하나님 앞에 선 예배자입니까?


묵상 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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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퍼슨은 자신의 민주주의 철학에 부합하는 예수님을 재탄생시켰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예수님은 묘하게도 제퍼슨을 닮아 있었습니다 

❶ 관련설교 – 2019 종교에서 관계로 나님인가, 하나님인가 

이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들의 오랜 고민이 해결되는 듯합니다.  

짧은 한국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경험한 한국 교회의 이념적 대립의 원인을 알 듯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군부독재자들을 지지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예배드릴 때, 

어떤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깃발을 들고 정권퇴진 운동에 앞장을 섰습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물질의 축복과 신유의 역사를 경험할 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 것이라고 설교하고,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자의 편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를 나눌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구원이라고 말을 합니다. 지독하게 인종차별을 자행하며 교회의 부흥을 이뤘던 미국 남부의 바이블 벨트에 거하는 크리스천과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는 북부의 크리스천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서로 총칼로 죽이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모두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한국 교회에서도 다른 얼굴의 치열한 대립으로 서로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대형교회들을 가리켜 맘모니즘에 함몰된 타락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립하기에도 버거운 작은 교회를 향해서는 목회에 실패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말을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부와 명예를 버리고 사명의 길을 떠나는 것이 진정한 제자의 삶이라고 말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와 명예, 지위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성연애와 같은 비성경적인 것들을 뿌리 뽑아야 할 ‘악’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대립되는 크리스천들의 논리를 들라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마치 <쇼핑>하듯 만족하는 교회, 만족하는 설교를 이곳저곳 찾아다닙니다. 시간과 물질을 투입구에 넣고 원하는 것을 눌러 얻는 자판기처럼 생각합니다. 이는 예배가 아니라 선택적 소비입니다. 예배자의 자세가 아니라 소비자 마인드입니다. 

➋ 관련설교 – 2019 종교에서 관계로 나님인가, 하나님인가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1de8aba1.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960pixel, 세로 4032pixel스카이 제서니는 이런 거짓된 종교를 가리켜 ‘내가 왕이다!’라고 주장하는 ‘소비주의에 젖은 종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이 아주 흥미롭죠? 

 

 

 

 

 

 

 

 

현대인들이 많이 듣는 말입니다. ‘소비자가 왕이다!’ 소비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권리가 있고, 또 소비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꺼이 돈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예배란 그 중심에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 드러나기 위해 나의 이름, 나의 모든 것을 내리고, 가리고, 감추어야 합니다. 나의 의도와 욕망을 비우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야 합니다. 

➌ 관련설교 – 2019 종교에서 관계로 나님인가, 하나님인가 

“다시 복음 앞에”라는 찬양이 있죠? 지금까지 말씀을 요약한 찬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이들 말하고 

많은 이들 노래는 하지만 

정작 가진 않는 길  

두려운 생각보다 

많이 힘들고 험한 길보단 

그저 말로만 가려기에 

점점 멀어져만 가네 

내게 생명 주었던 그 길 

점점 이용하려 하네 

내게 사랑 주었던 그 길 

다시 복음 앞에 내 영혼 서네 

주님 만난 그때 

나 다시 돌아가 

주님께 예배드리며 

다시 십자가의 길 걸으리  

(다음 장에 계속) 

이런 소비주의적 종교에 물든 예배에서는 단지 욕구 충족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 요구가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어 만족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만 존재할 다름입니다. 이런 소비주의적 예배에서는 예배자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철저하게 예배자를 섬겨줘야 만족이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소비자는 언제나 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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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인가, 소비인가?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자기의 생각으로 드리면 자기가 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예배는 부질없는 소비성이 있는 예배가 됩니다. 나 자신도 그런 때가 있습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잊어버린 예배로 허탄한 소비의 예배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높이며 송축하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내 주장과 삶을 대변하기 위해 성경과 예수를 이용하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 소비입니다.

예수는 주의 이름을 익살트(exalt) 높이는 것입니다. 리프트(lift) 깃발을 든다는 말처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잘 드러나기 위해 나의 모든 탐심의 마음을 내려놓고 감추어야 합니다. 나의 의도와 욕망을 비우고 온전히 하나님의 의와 뜻을 나타내어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는 참 예배를 드려야 신실한 예배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을 나타낼 수 있는 진리의 영이 되어 예배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2023.02.28
김은실
성도 한 명이 아쉬워서 백인백색의 기호에 맞추려다 나자빠지는 목회자들을 보고 자랐습니다.
곧기만 하면 한 칼에 부러지니까 세파에 맞춰 유연하게 흔들흔들거리다 마침내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목회자~~
결국은 사람을 좋게 하다가 하나님의 마음마저 놓친 경우였습니다.
부모님이 목회의 현장에서 수도 없이 겪어야 했던 성도가 아닌 소비자 마인드의 손님들의 요구와 변덕에 어린 시절부터 나는 절대 사모는 하지 않아야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거룩한 예배의 야성을 잃어버리고 점점 사람 중심으로 편의와 실리를 추구하는 성향으로 성장한 덕에 세계에서 내놓으라 하는 대형교회들이 많긴 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는 몇명이나 드리나 걱정하는 목소리를 요즘 많이 듣습니다.
교회된 내가 예배자로 매일 경건하게 살고자 몸부림 치는 시간이 고작 일주일에 한시간...그것도 제대로 된 예배였던가를 생각해봅니다.
설교의 홍수 시대에 내가 듣기 좋은 설교를 찾아 들으며 위안을 얻고 안일하게 연명하고 있는 자판기 앞의 성도가 내가 아니었던가를 돌이켜봅니다.
하나님!
입으로만 가는 그 길, 말로만 떠드는 그 삶이 아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3년을 살았어도 복음과 진리에 상관없이 자리다툼을 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제게 보이지 않도록 오직 진리에 살고 복음에 죽는 야성을 회복시켜 주소서.
2023.02.28
이명진
#3.
<높이다exalt>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경력이 없을 때였습니다
사립학교에서는 처음 근무를 해보는 터라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저와 같은 시기에 근무를 시작하신 선생님들과
학교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요

다른 선생님들이 우릴 쳐다봤습니다

왜지? 왜 우릴 보시지? 시선을 느꼈는데요
금방 밥 먹는데 정신이 팔렸습니다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선생님 한 분에 저희에게 오셔서
“그 자리는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이 드시는 자리예요”알려 주셨습니다

저희는 그것도 모르고 해맑게 남(?)의 자리에서
식사를 했던 거였습니다

직장 분위기, 문화에 따라 특정적인 자리가 있기도 한데요

오늘 묵상집에 나오는 단어인 exalt는
특정적으로 하나님께만 사용된 단어라고 합니다

-지존하다, 지극히(더 없이)존귀하다, 영화롭게 탁월하며 위엄이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성경에서는 ‘하나님’에게만 사용된다(시92:8,97:9,111:9)(네이버 교회용어사전)

다윗은 하나님을 높인다고 고백할 때 exalt를 사용했습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145:1)
I will exalt you, my God the King; I will praise your name for ever and ever

묵상집에선 이를 아래처럼 설명합니다

-예배는 주의 이름을 ‘높이는(exalt)’ 것입니다. exalt는 lift라는 단어보다는
훨씬 극적인 의미에서의 높임입니다. 흔히 ‘깃발을 든다’는 말처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든다는 뜻입니다(70쪽)

주님! 저는 ‘주님을 높입니다’라고 찬송도 하고요
기도로 ‘주님을 높입니다’라고 고백도 합니다

예수님을 높인다,며 고백할 때는?
생각과 마음 자세를 다르게 가져야 할 것 같아요

높인다,는 단어가 단순히 윗사람을 우러러본다는 의미가 아니라요

지존하다, 지극히 더 없이 존귀하다....라는
의미를 담아서 하나님을 높이길 원해요
202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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