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보 QT MY 메뉴
  • Home
  • >
  • QT
  • >
  • 2월 24일 언제 어디서나 예배
이전으로
2023년 02월 24일 금요일
다음으로
이전으로
2023년 02월 24일 금요일
다음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2월 24일 언제 어디서나 예배

통독표
video poster
출애굽기 3:5
펼치기/접기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예배’에 담긴 원어적 의미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절하다, 순복하다’(히, 티쉬타하바; 헬, 프로스큐네오)입니다. 영광과 권위를 지닌 존재에 대한 내적인 마음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인지하고 있는지가 내 언어와 행동에 그대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사역, 봉사, 일’(히, 아바드)을 뜻합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을 경작한 것, 제사장과 레위인이 성소에서 사역하고 제사드리는 것에도 ‘아바드’가 쓰였습니다. 몸으로 드리는 예배, 헌신, 봉사를 가리킵니다. 마지막 의미는 ‘두려워하다, 경외하다’(히, 야레)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고, 그 말씀에도 순복하게 됩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께 나의 ‘전 존재’로 최선을 다해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영·혼·몸을 다해 최선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공예배든 삶의 예배든 하나님께 반응하는 모든 시간과 장소가 예배의 자리가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므로 우리가 선 모든 시간과 공간이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범한 일상, 봉사, 섬김, 사역도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으로 유명한 로렌스 형제는 평신도 수도사로서 수도원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그에게 부엌은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성소였습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나의 사명도 있습니다. 그 자리에 세우신 뜻과 목적대로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반응하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 봉사, 섬김은 일이 아니라 예배입니다. 일은 때로 버거운 짐과 의무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예배는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❶ 공예배/사역/일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❷ 모든 곳에서 최상의 하나님께 최선으로 반응하고 있습니까?


묵상 도움글
펼치기/접기

❶ 관련설교 ➀ 2020 참된 예배자가 되기로 결심하다 

‘예배’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분주한 세상에서, 어떻게 주님을 향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의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예배란 영적으로 합당한 행위로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우리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섬김과 예배’를 분리해서 생각하려는 경향을 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과 ‘사역’을 한다는 것 사이에서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말장난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하는 사역이 ‘일’이 되지 않으려면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영적 예배’가 되려면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리는 헌신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장 1절) 

 

로마서 12장 1절에 나오는 ‘예배’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라트류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봉사’ 또는 ‘섬김’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됩니다. 실제로 영어성경인 킹 제임스 번역본에는 이 부분이 ‘합당한 봉사’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에는 ‘아바드’라는 동사가 있는데, ‘섬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 단어가 ‘예배 한다’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흔히 교회에서 사용하는 ‘사역 한다’라는 말이 단순한 봉사와 일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을 ‘예배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로 사역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차원에서 본다면, ‘사역 한다’라는 말과 ‘하나님을 예배 한다’라는 말은 동일한 행위입니다. 

 

만일 ‘사역이 예배’라면, 우리는 제물이 되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와 준비와 헌신이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열정임이 분명할 때, 하나님을 경험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8장 21-31절에 성막을 만드는데 들어간 물품들의 명세가 얼마나 디테일하게 나와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가장 힘들어하는 레위기에 제사 드리는 방법을 그렇게 자세하게 기록해놓은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나요? 예배와 사역은 하나님과 관계된 일들이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준비하고 규모 있게 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이 ‘내 일’이라면 대충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땀과 눈물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사역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이 아니라, 나에게 임한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일’은 때로 우리들에게 무거운 짐과 버거운 의무지만, ‘은혜’로 행하는 일은 감사가 수반됩니다. 은혜로 하는 일은 크고 작은 일이 없습니다. 단지 감사함으로 할 뿐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나의 ‘전 존재’로 최선을 다해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반응하는 모든 시간과 장소가 예배의 자리가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므로 우리가 선 모든 시간과 공간이 거룩한 것입니다.  

관련설교 ➁ 2023 이것이 예배다!-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우리가 성공적인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배는 단지 공간적으로 ‘교회’에서 그리고 시간적으로 ‘주일’에 드리는 것을 넘어 ‘삶’을 예배로 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계속 강조해 왔습니다. 또한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사는 ‘거룩한 사람’ 즉,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것도 이야기 해왔습니다. 

‘예배’란 어떤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께 우리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도, 거기에 신령과 진정이 있다면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1월 6일 묵상에 보면 예배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좋은 것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최선의 것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만일 우리가 무언가를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커다란 착각입니다. 우리가 채울 수 있는 하나님의 부족함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순종’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일상, 봉사, 섬김, 사역도 예배입니다. 그 자리에 세우신 뜻과 목적대로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반응하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 봉사, 섬김은 일이 아니라 예배입니다. 

관련예화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짜 예배자』 A. W. 토저 , 생명의말씀사, 05.12.30) 

“진짜 예배자는 모든 삶과 생각을 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세속화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속화하며 예배를 세속화합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영적으로 크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한 사람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믿음의 기도와 부흥이 일어나는 위대한 영적 운동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존귀와 경배와 진정한 예배를 받으시려면 아마 우리를 모두 없애 버리시고 다른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셔야만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정말 진정한 예배가 필요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의 하나님이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위로부터 거듭남으로써 하나님을 영적이요 인격적으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흠모하며 예배드리는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배는 주일에 교회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곧 월요일 아침이 됩니다.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평신도는 사무실로 출근하고, 그리스도인 교사는 학교로 가며, 그리스도인 엄마는 집에서 여러 가지 일로 바쁩니다. 월요일에,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적인 의무와 과업을 수행하려 할 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합니까? 여호와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 여전히 그분의 거룩한 성전인 우리 안에 거하시기 원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디서 일하든 그분의 자녀들이 계속 그를 사랑하며 즐거워하고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에는 여러분의 전존재가 다 포함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닌 것도 이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 속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할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참되고 복된 예배를 드리려면 여러분의 삶 속에 있는 어떤 것들이 반드시 파괴되고 제거되어야 합니다. 

 

관련예화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김남준, 생명의말씀사, 10.05.10) 

“삶에 대해 생각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들을 얼마나 많이 비추어 보고 있습니까? 요즘은 성경의 어느 부분을 읽고 있습니까? 거기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말씀 앞에 여러분의 삶이 드러납니까? 진리를 깨닫고 자기를 인식하는 데서 오는 아픔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교훈하시고 책망하시고 또 권고하시고 교육하시는 즐거움을 말씀 속에서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민감합니까? 

만약 우리가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도 예배하는 형식만을 되풀이함으로써 단지 예배를 값싼 은혜의 도구 정도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아무 날 무슨 순서로 예배하든지 너희 마음대로 해라.” 

하나님께서는 결코 의롭고 온전하게 산 사람들만이 예배드릴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주님께서는 오히려 수고하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무거운 죄와 근심의 짐을 진 사람들을 당신을 예배하고 섬기는 곳에 초청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멍에를 벗기시고 자유케 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괴로운 짐을 지고 실패한 삶을 숙명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셔서 하나님 안에 있는 자유로 경배하게 하시고 은혜를 느끼게 하십니다. 

스스로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밖에는 의지할 데가 없다고 고백하며 나아오는 사람들의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다음 장에 계속) 

“견디고 있습니까?” 

요즘은 예배가 성도들에게 인내가 필요한 종교적 의무라고 이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배를 견디는 방법도 가지가지인데 그 중 예배 견디기의 극치는 설교 견디기(?)입니다. 그리고 그 형태도 천태만상입니다. 

멀거니 강단을 응시하는 딴 생각파, 주보에 밑줄 긋고 틀린 글자까지 찾는 주보 교정파, 졸면서 예배드리는 수면파, 수시로 시계만 들여다보는 시간 절약파, 옆 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쪽지파, 예배 후 있는 회의 준비에 여념이 없는 회의파, 성경 읽기로 시간 때우는 실속파, 이런 식의 예배 태도는 단지 예배를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바로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는 예배의 모습들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드리는 예배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예배 속에서 성령과 교통이 없고 인간의 심령을 찌르는 하나님의 음성이 없는데 어떻게 무관심한 예배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졸음과 무관심, 냉담함과 아무런 기대감이 없는 마음, 딴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 단지 예배가 끝날 때까지 예배를 견디는 마음, 이런 것들이 오늘날 예배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예배 가운데 함께하시는 표징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오, 하나님, 예배의 기쁨을 잃어버린 교회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성령이 예배를 장악하시고 진리가 살아 역사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일 때 그들은 성령의 증거와 말씀의 진실 앞에서 자기 자신 때문에 고뇌합니다.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영적인 역사를 동반한 예배 가운데 그들은 뜨거워지기도 하고 흔들리던 마음이 냉정을 되찾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 속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를 통해서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살아 있는 예배를 통해서만 우리 영혼 안에 있는 진정한 목마름의 해갈을 경험하고 이전에 조금도 목말라 하지 않던 것에 목말라 하게 됩니다. 

예배와 관련하여 우리가 영원히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그분 백성과의 만남입니다. 이것보다 예배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그의 백성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함으로 그의 백성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도 확인받게 됩니다. 

  • 댓글을 통한 금전요구는 사기성 스팸입니다.
Download
PDF 다운로드
묵상 일기
0 / 5,000
묵상 나눔
이지현
진정한 예배의 대해 좀 더 깊이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함으로 내 몸과 마음이 함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 분께 순복하며 권위를 인정하게 하시고, 그 안에서 내가 기쁜 마음으로 예배 드릴 수 있게 인도하심에 감사합니다.
나의 몸이 주의 성전 임을 깨달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삶이 곧, 예배의 자리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눈동자처럼 보호하시는 최상의 하나님 아버지께 나의 최선을 다해 정성껏 드려지는 예배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에게 허락하신 모든 자리에서 거룩한 에배자의 모습으로 살 때에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시며, 그 분의 임대하심을 경험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2023.02.25
최주창

언제 어디서나 예배

예배에 담긴 원어적 의미는 절하다 순복하다 이며 사역 봉사하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또는 몸으로 드리는 예배는 헌신 봉사를 말하며 두려워하다 경외하다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반응하는 모든 시간과 장소가 예배의 자리가 됩니다.
어디나 계신 하나님께 나의 영, 혼, 몸을 다해 최선으로 반응함에 예배드리는 곳이 됩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사명이 있으며 그 자리에 세우신 뜻과 목적대로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반응하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예배는 거룩한 곳이요 구별된 곳이니 세속의 마음을 벗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예배를 드려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순종의 예배를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2023.02.24
김은실
내성적이고 그래서 소극적인데다가 자존감이 낮은 딸과 변화산에 등반하여 완주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매사에 욕심도 없고 의지도 없고 표현도 안하는 편이라 도대체 믿음은 있는지 종잡을 수 없어 중학교 입학할 즈음부터 오로지 딸에 대한 기도제목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하게 하셔서 세상 가요를 부르는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달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만청 신입생 OT, 수련회, 변화산 등 교회의 프로그램을 마주하면 딸 눈치를 살펴 비위를 맞추고 물질적 보상을 약속하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어떻게든 참석케 하는 것까지가 엄마의 최선이었습니다.
물론 순간순간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딸의 마음을 만져주세요.
놀랍게도 딸의 마음이 말랑해지고 눈에서 눈물도 나오고 입술에서 찬양도 기도도 나오는 것을 발견한 변화산이었습니다.
중고시절엔 잠을 못이겨 번번히 실패한 변화산에서 한번을 안졸고 말씀을 듣습니다.
딸이 신기해서 예배 중에 몇번을 곁눈질로 힐끔거리며 감사가 넘칩니다.

기독학교 공동체 안에서 학부모로 만난 소중하고 귀한 인연들을 몇달만에 민났습니다.
서로를 진심 아끼고 서로의 자녀를 내 새끼저럼 생각하는 넷은 무슨 말을 해도 용서가 되고 품고 기도하는 사이입니다.
딸의 변화를 자랑?처럼 신기해서 얘기하니 셋다 한결같이 말합니다.
"딸 위해 그 기도만 하더니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셨네~할렐루야!"

나이 들수록 인간관계가 정리됩니디.
가지치기가 되어 한정적인 내 에너지가 양분으로 연견될만한 가지만 남습니다.
그래서 나이 먹는 게 좋습니다.
오늘 묵상과 더불어 이 모임을 생각하니 삶의 예배는 만나는 사람들과의 교제 속에서도 드려짐을 깨닫습니다.

이들과 3시간을 있는데 나누는 대화들이 말씀이고 선교이고 은혜고 감사찬양입니다.
한 사람을 축하하는 자리였는데 넷 다 밥값을 계산하려는 이유를 침튀기며 말합니다.
밥값 기회를 놓쳐 카페에서는 선수쳐서 커피값을 냈더니 그것마저 놓친 사람은 빵 한보따리씩을 포장해서 손에 쥐어줍니다.
가만히 있던 왕언니는 이미 준비해온 반찬과 과일을 차마다 넣어줍니다.
서로를 다독이고 배려하고 챙기고 공감하고 기도제목을 나누는 오늘 교제를 통해 초대교회의 삶의 예배를 산 것 같습니다.

내가 맺는 모든 관계가 이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망하며 수도원의 로렌스 형제를 마음에 떠올립니다.
하나님!
어차피 허상인 잠깐 살다가는 순례의 길인 이 땅에서 구질구질하지 않게 살고 싶습니다.
욕망 따르지 않고 주님이 본을 보이신 삶대로 흉내라도 내도록 저를 날마다 빻아주세요.
2023.02.24
로딩중...
0:00 0:00
닫기
1.0x
0.5 1.0 1.2 1.5 2.0
닫기

구독설정

구독한 콘텐츠는 MY구독에서 한번에 볼 수 있어요.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