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를 드리면 안 되나요?
(고전 10:14,19-21,23-24,31)
뜨거운 감자, 제사
한국교회와 기독교 역사에 있어 늘 논쟁이 끊이지 않는 뜨거운 감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입니다. 이 제사의 문제는 사실 두 ‘Identity’의 충돌로 빚어지는 일이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의 ‘정체성의 충돌’과 같은 문제이기에 중재하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과거 개신교 선교 초기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이에 대하여 ‘위대한 용기’가 필요했고, 지금까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탈하는 불이익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죠.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한번 곱씹어 봐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좋지만 불효자가 될 수 있다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결단으로 인해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복음을 듣고 변화된 삶을 기대할 수 없도록 막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인식의 전환
때문에, 제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교회 중심적 전통’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선교’로 전환될 필요가 있습니다. 제사를 허용하기 보다는, 아직 제사를 드리고 있는 사람이 복음 가운데 들어오도록 문을 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 같은 고민 가운데 탄생한 좋은 모델이 있습니다. 바로 ‘추도식’입니다. 제사 가운데 있는 ‘우상 숭배’의 요소와 우리가 꼭 기억하고 지녀할 조상에 대한 추모 의식, 그리고 ‘효’ 사상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한국적 기독교의 좋은 모델인 것이죠. 물론 이 ‘추도식’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여전히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조상을 귀신으로 바라보며, 그 앞에서 행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죠. 예로 절을 하거나, 제사상을 차려 올리거나, 향을 피우는 행위 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행위가 우상 숭배가 아니라 조상을 추모하는 효의 행위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가지 해답
여기에 두 가지 해답이 있습니다. 하나는 선교적 관점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올바른 신앙적 가치관을 가질 때 오는 해답입니다. 선교적 관점에서의 해답 모델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설교할 때 당시 헬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 관념을 부정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교적 문화를 인정하며 대화의 통로를 삼았다고 하는 것이죠. 이와 같은 원리로 제사를 단순히 나쁘다고 말하기보다, 효의 본성을 칭찬하며 기독교가 결코 불효한 종교가 아님을 알리는 Contact point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두 번째 해답은 제사의 모양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23-24,31에 근거하여 믿음에 따라, 제사가 아닌 조상을 향한 추모의 의미로 절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 믿음의 고백으로 어떤 일이던지 할 수 있습니다. 제사에 대하여도 그렇습니다. 확신하는 바, 하나님 앞에서 우상숭배가 아님을 확신하는 사람에게 제사가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그러니 명쾌한 해답은 누군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결단”에 있다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나의 행위가 덕을 세우는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인지 분별하며 결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번 한주도 하나님 앞에서 늘 지혜로운 분별과 결단으로 세상과 하나님의 통로가 되시는 삶을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가장 크게 배우고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요?
결단해 봅시다.
추천도서
『일상의 결정들』
김병삼 저, (두란노,2022.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