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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최고봉

교만과 완고함을 버리십시오!

통독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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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노트

  • 계속적인 회심이 우리를 계속적인 순종으로 인도합니다. 이때 성령께서 우리 삶을 다스리시기 시작합니다.

묵상질문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까?
부끄러워하지 말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으로 살아봅시다.


묵상 레시피

◆시편 131:1-3 + 마태복음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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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1:1-3)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마태복음 18:3)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무엇에 비유합니까? (2절)
  • 아이와 같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3절)
  • 131편을 곱씹으며 묵상하고 기도해 보십시오.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1절)
131편은 자신을 높이고 교만하게 되는 것이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눈’은 교만한 마음이 외부로 표출되는 통로이다(18:27, 신15:9, 잠6:17).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2절)
‘평온(히, 쉬우위티)’은 ‘평평하게 하다, 고르게 하다’라는 뜻으로 어떤 상황과 형편이든지, 어떤 사람으로 인해서든지 흔들리지 않는 마음 상태를 나타낸다. ‘고요(히, 웨도마므티)’는 ‘멈추다, 그만두다’라는 의미로, 인위적으로 무언가 하려는 노력을 멈추는 것을 가리킨다.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절)
젖 뗀 아이는 이제 젖으로 인해 어머니에게 떼를 쓰지 않는다. 그저 품에서 평온하게 안겨 쉰다. 시인은 무언가를 바라고 욕망하며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불안정한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참 평안의 상태인 것이다.


◆ 묵상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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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은 계속되어야 한다

오늘 묵상의 주제 역시 원문 제목 “계속되는 회심”(Continuous conversion)에 정확히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마태복음 18장 3절(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이 “계속되는 회심”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주님의 이 말씀은 처음 거듭날 때에도 해당되는 진리이지만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도 계속 적용되어야 하는 진리입니다. 곧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존 맥아더의 [주님 없는 복음]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교양 있는 자가 아닌 “어린아이”에게 진리를 보이신다. … 어린아이와 같은 반응은 인간의 지혜나 완고한 교만에서 나오는 반응과 반대이다. 여기에는 기술이 없고, 배우지 못했으며, 능력 없는 사람의 겸손이 필요하다. 어린아이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의존”이다.

누가 구원에 들어갈 수 있는가? 어린아이처럼 의존하며 독립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겸손하고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다. 자신이 무력하고 가진 것 없음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어린이에게는 자기보다 힘이 세거나 믿을 만한 사람을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회심했다는 증거는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의지가 일회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로 유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심’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자연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돌아서는 것이 회심입니다. 자연적 상태에서는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살았지만, 영적인 상태에서는 성령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자주 ‘영적 훈련’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습니다. 이유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관계는 계속적인 변형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한 가지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계속적인 회심이란 우리가 매일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상황이 변화무쌍해도 성령님은 여전하시며, 주님의 구원도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상황이 변했다고 자꾸 고개를 들고 나타나는 자연적 본성이 우리를 다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해야 하는 것은 성령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자연적인 본성이 매일 새롭게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도록 계속해서 회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오랜 문제가 하나 해결됩니다.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이 저렇게 타락할 수 있는가?’라는 의구심입니다. 그 사람 역시 회심을 체험하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자연적인 삶으로 다시 돌아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책임’이 따라 옵니다. 매일 우리의 삶이 회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살지 못한 우리의 삶에 분명히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삶의 장애는 우리가 계속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적인 변화를 가로막는 것일까요?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완고함과 교만’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교만과 완고함을 신성화시켜 잘못된 이름을 붙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완고함을 결점으로 보실 때 우리는 그 완고함을 ‘힘’이라고 부릅니다.”


아주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교만과 완고함을 ‘신성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교만과 완고함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완고함을 힘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그 힘을 내려놓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교만이라는 것을 말이죠. 교만과 완고함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께 순복하지 못합니다. 불순종은 아직까지 자연적 의지가 자신을 주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자신의 삶이 변화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교만을 꺾으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이 이미 나를 얼마나 많이 변화시키셨는지를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내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하고자 하는 내 안의 욕망을 고쳐 주셨는데, 이것은 나의 다른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나의 “모든 병을 고치시며” 나의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나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내게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셔서 나의 교만을 꺾으시고 고분고분하게 만드셔서 내 목에 주님의 멍에를 메어 주셨습니다.

지금 나는 그 멍에를 메고 있고, 그 멍에는 내게 쉽고 가벼운데, 주님이 그렇게 약속하셨고 그렇게 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멍에는 정말 가벼운 것이었는데, 전에는 그것을 몰라서 그 멍에를 메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의지로 의지를 내려놓는다!’ 이 말은 자신의 교만과 완고함을 하나님 앞에 완전히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압적으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의지로 의지를 내려놓기 위해서는 매일 새사람을 입어야 하며, 매 순간 계속적으로 회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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