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 6:14
한 줄 노트
- 제자의 삶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서약’에서 시작됩니다.
묵상질문
당신은 한 번이 아닌, 매일 매 순간 부르시는 ‘와서 죽으라’는 말씀에 대하여 반응하고 있습니까?
묵상 레시피
(로마서 8:31-39)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ㄱ)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갈라디아서 6:14)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누가 우리를 고발할 수 있습니까? (31-33절)
-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습니까? (34절)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35절)
- 바울은 우리를 무엇에 비유합니까? (36절)
- 넉넉히 이기는 힘은 어디로부터 옵니까? (37-39절)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33절)
로마서 5-8장에는 ‘확신’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된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확신에 대해 외부의 조롱과 더불어 성도 스스로의 흔들림이 있다. 우리의 ‘믿음’에 모든 것을 기댄다면 우리는 넘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믿을’ 때 ‘의롭다고’ 칭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복음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가 하나님 가족의 구성원이라 선언하시며 보호하신다.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36절)
바울은 시편 44:22절을 인용한다. 44편에서 언급된 고난은 본인의 불신이나 신실함과 상관없이 온 고난이다. ‘죽임’은 극한의 고난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헤아릴 수 없어 회의하며 질문하는 성도들의 씨름과 결단의 과정을 함축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들의 고난을 <통하여> 그리고 심지어 그들의 고난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성도들의 고난과 ‘죽음’은 자녀이며 상속자로 받는 것이다(17절).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 완승할 수 있다(37절).
구속의 은혜로 사는 것
어제 묵상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자유의지의 관계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오늘은 ‘의지’에 대한 부분을 조금 더 다루어 보겠습니다. 본래 원문의 제목은 질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개인적으로 주님의 구속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How can I personally partake in the atonement?)
챔버스가 늘 강조했듯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속의 은혜는 우리에게 강압적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다가올 때, 우리의 의지에 호소합니다. 의지는 구속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선택의 문제를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도의 가장 위대한 특권은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서약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서약은 죄에 대한 죽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든지 당신 안에 있는 죄를 놓지 않든지 둘 중 하나를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압적으로 이끄시지 않는 것은 언제나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늘 우리에게 ‘가능성’입니다. 하지만 의지적 결단이 없다면, 가능성은 언제까지나 가능성에 머물 뿐입니다.
오늘 묵상에서 챔버스는 우리의 의지가 답해야 하는 네 개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 죄에 대해 내리신 판결을 받아들입니까?”
2.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해 아주 작은 관심이라도 있습니까?”
3. “그리스도의 죽음과 일치되기를 원하며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 위해 나 자신과 죄와 세상에 대한 모든 관심을 철저히 제거하기를 원합니까?”
4. “그분 외에 모든 것을 향해 죽기를 원합니까?”
위의 질문에 우리가 의지적으로 답할 때, 비로소 주님의 죽음과 하나 되는 초자연적인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의지적 결단이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의 ‘옛 자아’가 죽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속에 있는 옛 자아가 죽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당신의 ‘옛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증거는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영생)이 당신으로 하여금 놀라울 정도로 쉽게 그리스도 예수의 음성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순종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 속에서 의지적 결단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정하고 나면 쉬워지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을 믿을지 말지도 결정하지 못한 사람의 고민과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한 사람의 고민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닐까요? 순종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과 순종의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구속’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과 함께 우리의 옛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안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생명이 역사합니다. 새 생명이라는 말은 우리 안에서 주님의 생명과 내 자아가 연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완전한 삶과 의지의 변화, 그래서 순종이 자연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내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
카일 아이들먼의 [팬인가, 제자인가]에 나오는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의 슬로건은 단 한마디다. “와서 죽으라(Come and die).”
아무것도 잃은 게 없다면 과연 진정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고서 답해 보라. 예수님 때문에 뭔가를 희생한 적이 있는가? 희생이 없었다면, 최소한 약간의 불편함이라도 겪지 않았다면,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해 죽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욕심과 꿈, 계획이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순간, 우리 자신은 끝나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말은 곧 자신에 대해 죽겠다는 말이다.
자신을 죽이는 것은 한 차례의 결심이 아니다. 매일 같이 죽고 또 죽어야 한다.
주님의 제자의 삶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서약’이 반드시 요구됩니다. 죄에 대한 죽음을 십자가 아래에서 서약하고 결단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제자도의 가장 위대한 특권입니다.
챔버스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주님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강조해 왔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오늘 우리가 아주 중요하게 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구속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일의 참된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했던 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격을 누리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구속에 참여하는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어 세상을 살아갑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역사하시도록 우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기꺼이 주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이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일치된 삶을 통해 매일 매일 역사하시는 주님을 경험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