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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평화를 부수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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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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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노트

  • 회개의 고통을 통과하지 않고는 새로운 평화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묵상질문

말씀의 검이 당신의 가슴을 깊이 찌르고, 그로인해 애통하며 회개한 경험이 있습니까? 참된 평화는 아픈 회개와 어려운 화해의 과정을 지나서 찾아옵니다.


묵상 레시피

◆요한복음 8:1-11 + 마태복음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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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1-11)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0:34)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 앞에 누구를 데려왔습니까? (3-4절)
  • 예수님께 무엇을 물었고,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5-6절)
  • 예수님은 어떤 행동과 어떤 답변을 하셨습니까? (6-7절)
  • 예수님은 여인에게 어떤 말을 건네셨습니까? (10-11절)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5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예수님이 ‘돌로치라’ 명하시면 무정한 사람이 되고, 여자의 손을 들어주면 무법한 사람이 된다. 당시 사형 집행권은 로마 당국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돌로치라’는 입장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말씀이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곤경에 빠지지 않으신다. 몸을 굽혀 손가락에 쓰신 것은 친히 율법을 새겨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을 기억나게 한다. 예수님은 율법이며 말씀 자체이신 분이다. 그 법에 담긴 뜻과 정신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다. 법조항에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영혼을 살리시는 것이 예수님의 방식이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절)
주님은 여인을 긍휼히 여기며 영혼으로 보실 뿐 아니라, 그에게 남아있는 죄의 문제를 언급하신다. 사랑의 하나님은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죄를 간과할 수 없으시다. 또한 죄의 삯은 사망이다. 여인의 구원이 일회성에 지나지 않고 생령으로서 날마다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왜 여인은 간음하게 되었을까? 여인은 말씀과 하나님 앞에 반추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묻고 듣고 순종해야 할 것이다.


◆ 묵상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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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함

오늘과 내일 묵상은 챔버스가 ‘일꾼의 올바른 태도’라는 제목으로 강의했던 내용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오늘 묵상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엄격하게 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챔버스가 했던 말과는 조금 배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강요하지 말라거나, 주님은 절대로 강압적으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에게 엄격하게 대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맡기는 것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동하라는 것일까요?


첫째, 엄격하게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온유함’을 착각합니다. 주님의 온유함은 단순한 연약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고 깨뜨려서 진정한 온유함이 필요함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는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잘못은 인정하지만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동정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대신 그 사람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복음을 대항하고 싫어하는 뿌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원하지만 그들의 뿌리까지 변화를 요구하는 복음에 대해 견디지 못합니다.”


둘째, 주님의 방식으로 대해야 합니다.

참된 치유를 가능케 하기 위한 주님의 방식은 무자비하게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찌르는 것입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복음을 증거할 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곳으로 피할 수 없이 그 메시지를 적용할 수밖에 없도록 하십시오.”


주님께서 니고데모를 대하셨던 방식을 생각하십시오. 직설적으로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셨던 것. 부자 청년관원이 영생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찾아왔을 때, 날카롭게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셨던 것.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제자의 도를 말씀하시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명령하셨던 것.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피할 수 있는 여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말하지 않고 ‘결단’하라고 촉구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접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때 그들은 ‘우리는 절대 그렇게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예수님은 당신들이 그러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복음이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제자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의 태도에 대하여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자로 사람들 중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설교자의 의무는 회중에게 정죄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아니며 그들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도 아니다. 설교자는 단지 그들을 하나님 앞에 서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진리를 들은 후에 전과 같을 수 없다. 진리에 관심이 없다거나 모든 걸 다 잊은 것처럼 말할 수도 있지만 어느 순간 진리가 그의 의식에서 떠오르며 마음의 평화를 깨뜨릴 것이다.

설교자는 각 사람들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메시지를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방법으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신다. 설교자는 진리의 실체를 설교하며, 말씀 그대로 살라.


우리의 담대함은 이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4-15절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셋째, 거짓 평화를 깨뜨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마태복음 10장 3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복음은 ‘온유함’이라는 이름으로 거짓과 죄를 덮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온유함은 모든 죄를 들춰내고 치유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검’은 복음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거짓된 자아를 깨는 것입니다. 거짓된 평화는 ‘착각’입니다. 말씀의 검은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양심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폐부를 찌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거짓 평화를 부수기 위해 검을 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직 참된 평화는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챔버스가 가장 많이 강조하는 말 중의 하나는 ‘인격적 관계’입니다. 관계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깨어지는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아픔의 시간을 통해 서로를 알아갑니다. 거짓 평화는 껍데기를 깨지 않고 그럴싸하게 자신을 포장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관계는 아프지만 회개라는 내적싸움과 치료의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아프지만 자신의 내면을 보면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약점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용서와 화해라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평화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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