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갈 4:22
한 줄 노트
- 육적인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인 희생의 단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 ‘허용된 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은 더 이상 거룩한 부분과 세속적인 부분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묵상질문
오늘 당신의 삶에서 제거해야 할 자연적 욕망은 무엇입니까?
묵상 레시피
(창세기 17:17-21)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20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21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갈라디아서 4:22)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7-18절)
-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반응에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19,21절)
- 하나님은 이스마엘에 대해 어떤 약속을 하십니까? (20절)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8절)
하나님이 찾아오신 때는 아브라함이 99세, 이스마엘이 13세였을 때다. 아브라함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15:4)’는 말씀이 곧 이스마엘에 관한 것이라 믿었다. 아브라함은 13년 간 이스마엘에게 마음과 정성을 다했을 것이다. 아브라함 부부가 조금의 의심 없이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받아들인 데는 사라의 생물학적 조건이 작용했을 것이다(17절).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더욱 구체화 되었다. ‘내년, 사라가, 이삭’을 낳을 것이다(21절). 이제 아브라함은 ‘허용된 의지’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 너무나 명확한 말씀 앞에 인간의 상식, 현상, 감정적 요인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일만이 남아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도 그가 누릴 분복을 허락하셨다(20절).
1.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묵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에 등장하는 ‘두 아들’ 즉,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챔버스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별하는데, 이스마엘을 자연적인 아들의 결과물로, 이삭을 영적인 아들의 결과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죄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오직 희생에 의해 영적인 것으로 변화됩니다.”
참 어려운 내용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영적인 방법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으로 낳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내보내시고, 영적인 아들 이삭을 통해 믿음의 대를 이어가고 있음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 몸종에게서 얻었다고 해도 첫 아들을 포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잘 이해되지 않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현실에서 공존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챔버스가 오늘 묵상에서 ‘희생’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연적인 것의 희생은 하나님의 작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용하시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자연적인 것이 순종을 통해 영적인 것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도 챔버스가 계속해서 이야기했던 ‘순종’의 본질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기를 원하시지만 억지로 순종하도록 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생각과 삶을 포기하고 영적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를 억지로 그렇게 만드시지는 않습니다.
자연적인 결과물을 포기하는 것이 힘들고 희생을 동반하는 이유는 그러한 것들이 ‘죄’로 인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적인 것을 먼저 희생하지 않고 영적인 희생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먼저 포기하게 하시고, 영적인 아들 이삭을 포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성화’와 ‘거룩’은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이 단순히 원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입니다.
“성화는 죄로부터의 구원 및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성화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나 자신을 마음을 다해 다시 주께 드리는 것입니다.”
2. 괴리가 아닌 연합
챔버스가 오늘 묵상에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인 삶이라고 해서 자연적인 삶과 관계없는 삶은 아닙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자연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 훈련과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자연적인 삶을 위해 우물물이 터지게 하시고 그 삶을 오아시스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아브라함은 많은 훈련의 시간을 통해 결국 육적인 아들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보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하셨을 뿐 아니라, 믿음의 조상이 되리라는 약속을 영적인 아들 이삭을 통해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부분인데, 창세기 21장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이스마엘)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포기와 훈련의 과정을 지나게 하심으로 영적으로 하셨던 약속을 아브라함의 자연적인 삶을 통해 이루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폴리슨의 책 [일상의 성화]에 나오는 글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더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현실과 멀어지고, 종교적이 되며, 평범한 일상에서 분리되어 고상한 것을 좇게 되는 것이 전혀 아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 우리의 말이 더 통찰력이 있어지고, 더 신중하면서도 타인에게 기쁨을 주고, 동시에 더 현실성 있게 되어 가는 것이다. 현실에서 느끼는 인간의 한계와 필요 속에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기도로 구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 가는 것이다. …
다시 말한다. 성화, 성도, 거룩, 경건, 신성함 등은 우리의 일상을 설명하는 단어들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고, 삶에서 더 기쁨을 느끼고, 더 뚜렷한 목적을 갖는 것만큼 우리의 삶과 직결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더 지혜로워지고 삶에서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만큼 우리의 일상에 유익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훈련의 시간을 거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삶이 영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틀림없이 훈련과 시련의 시간을 지나게 됩니다. 이 시간을 지날 때, 우리가 ‘희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God’s order)이 아니라, ‘허용하시는 뜻’(His permissive will)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작정’이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입니다. ‘허용하시는 뜻’이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데 우리를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즉, 우리가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쓰임 받을 수도 있고, 의지적으로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항할 수도 있습니다. 챔버스는 이러한 ‘허용하시는 뜻’을 맞이할 때가 ‘훈련의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훈련은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다. 이 시간들을 통해 우리는 자연적 욕망에 굴복하지 않고 점점 더 영적인 헌신에 가까워집니다. 이 말은 육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자연스럽게 순복하는 과정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