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 2:4
한 줄 노트
- 노트 변하는 상황이나 감정에 마음을 두지 말고, 늘 인격적인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묵상질문
오늘 당신이 의지하는 것은 무엇인지 정직하게 생각해봅시다. 당신의 재능과 계획으로 살아갑니까, 아니면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갑니까?
묵상 레시피
(고린도전서 2:1-5)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 바울의 말씀 선포와 삶의 가장 중심은 무엇이었습니까? (1-2절)
- 바울의 설교와 삶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3-4절)
- 바울의 믿음의 근간은 무엇이었습니까? (5절)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2절)
바울은 말씀을 선포할 때 선포의 방식보다 선포의 내용에 더 힘을 쏟았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은 곧 헬라 세계에서 통용되던 ‘철학적 언사, 화려한 문학적 수사법’의 ‘탁월함’을 의미한다. 바울은 언변과 기교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화려함 속에 ‘십자가의 도’가 가려지지 않도록 선포의 내용을 우선으로 한 것이다. 십자가는 구원을 위해 지나가는 과정의 일부분이 아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의 존재와 삶, 사고 전체를 십자가로 재해석 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전체를 하나의 축으로 묶어’내고 풀어내는 ‘열쇠’이다.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3절)
십자가는 단지 바울이 선포한 말씀의 ‘내용’만이 아니었다. 바울은 실제 그의 삶에서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했다. 바울도 한 인간으로서 연약하고 두려움 가운데 위축되는 경험들을 했다. 수많은 고난과 중압감 속에서도 바울이 선포하고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의 능력, 성령과 그 능력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는 십자가와 성령 앞에서 ‘연약한 자’임을 고백했으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사역을 감당했다. 바울의 설교와 사역의 주체는 바울이 아니라 ‘성령’이었다.
너희 믿음이,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5절)
믿음에 있어 ‘인간의 결단과 결심, 결정’보다 먼저인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분명히 응답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단독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 가운데 역사하실 때만 가능하다. ‘믿음은 인간의 결단이나 결정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복음을 전할 때 주의해야 할 것
지금까지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묵상하며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제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글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히는 묵상집이 바로 [주님은 나의 최고봉]입니다. 이 책은 기존의 다른 묵상집과 접근 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사적인 이야기가 전혀 없고 예화도 없으며 언어도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역할만은 잘 수행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 책은 성령님을 의지한 한 남성과 여성의 작품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스터디 가이드] 중에서. . .)
오늘 묵상에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저지르기 쉬운 두 가지 오류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오류는 우리의 지식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4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이 고백은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 바울이 경험했던 실패와 연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이방인들과 논쟁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철학적 지식과 현란한 수사학을 이용해 말씀을 전했지만, 사실 좋은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경험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성령의 능력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을 선포할 때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는 대신에 구원의 방법에 대한 당신의 뚜렷한 지식을 의지한다면 당신은 사람들이 실체 되시는 주님께로 오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은 설교의 기술이 아니라, 설교할 때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기대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는 상대방의 영혼 안에서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 안에서 생명을 창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오류는 복음을 전할 때, 우리의 체험으로 주님의 구속을 대신하려는 경향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체험만을 강조합니다. 복음의 내용이 빠진 간증은 우리를 ‘광신’으로 이끌고 변질시켜 갑니다.
“만일 당신의 믿음을 체험에 둔다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언제든지 당신의 믿음을 흔들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하나님 또는 구속의 실체를 흔들 수 없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의 형상을 본받아]에 보면 우리가 끊임없이 주의해야할 부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체험은 절대 내 믿음의 바탕이 될 수 없다. 체험은 단지 내게 믿음이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죄로부터의 놀라운 구원을 체험했고 성령 세례를 받았다. 이 체험들은 단지 공상이 아니라 실제이다. 이러한 체험을 한 이후 날마다 놀랄 정도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새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두는 대신에 체험에 두게 된 것이다. 만일 이러한 위험에 빠지면 우리의 믿음은 삐뚤어지면서 그릇된 믿음으로 전락하게 된다. 성령 세례를 받은 초대 교회의 제자들은 그들이 가르친 교훈과 일치된 삶을 살았다. 즉, 성령님을 받은 그들이 살아 있는 서신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우리의 가능성이나 능력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정말 성실하고 열심이었던 사람들, 하나님께서 놀랍게 은사를 부어주셨던 사람들이 흔들리거나 실패하는 것들을 종종 목격하고 경험합니다. 챔버스는 말합니다.
“당신이 진정 실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면 아무것도 당신을 흔들지 못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는 한, 당신은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감정은 언제나 유동적입니다. 우리의 감정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상황에 따라 요동하고 쉽게 흔들리며 유혹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격을 믿을 때, 우리는 오로지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이 하시는 일에 기꺼이 나의 의지를 양도하게 하고, 그분이 쓰실 수 있도록 나의 손과 발을 온전히 내어드릴 수 있게 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변덕스러운 마음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구별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네 느낌을 믿지 말라. 그것은 금방 다른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원치 않아도 변하게 마련이다.(욥14:12). 그래서 한때 기뻐했다가 곧 슬퍼하고, 한때 평온했다가 곧 문제에 휩싸이고, 한때 신앙이 좋았다가 곧 세속적이 되고, 한때 부지런했다가 곧 게을러지고, 한때 심각했다가 곧 쾌활하게 된다.
그러나 지혜롭고 영적인 가르침을 잘 받은 사람은 이런 변화무쌍한 현실 위에 굳게 서 있다. 자기가 느끼는 것이나 불안정한 바람이 부는 방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온 마음이 올바른 최상의 목표를 향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줄곧 마음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언제나 흔들림 없이 동일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마음의 눈이 순전하면 할수록(마6:22), 그만큼 더 한결같은 자세로 온갖 폭풍을 헤쳐 나가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경우 순전한 마음의 눈이 흐릿해지기 쉬운데, 그것은 자기가 만나는 즐거운 일에 재빨리 눈길을 돌리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