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약 2:10
한 줄 노트
- 우리의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가 필요함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묵상질문
혹시 당신이 행하는 불의한 일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불로 덮어놓고 애써 무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묵상 레시피
(로마서 6:15-19)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야고보서 2:10)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 은혜 아래 누리는 자유는 어떻게 왜곡될 수 있습니까? (15절)
-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어디에 속한 자입니까? (18절)
- 그들은 누구에게 순종하며, 어떤 변화를 보입니까? (16-17,19절)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절)
성도들은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자유는 도덕적 진공 상태가 아니다.’ 더구나 이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값비싼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성도들은 이제 ‘자유’를 누리기 위한 새로운 ‘질서’ 가운데 편입된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 창조주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한 새로운 행동 기준들을 따르게 된다. 이는 강제적 의무나 규칙이 아니다. 죄로 인해 잃었던 형상, 품위와 권위를 회복하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기쁨의 여정이다. 또한 이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역자로서 참여하는 것이다.
율법 제대로 알기
챔버스 당시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유명한 목회자였던 G. 캠벨 모건은 챔버스의 ‘도덕성’ 강의를 아주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오늘 묵상 글은 비디가 그 유명한 강좌 중 첫 번째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요, 복음은 그 죄책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왜 우리에게 죄책감을 심어 줄까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율법(도덕법)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유전으로 물려받은 죄성 및 인간의 약함을 고려하지 않고 언제나 완전한 도덕을 요구합니다.”
율법의 특징은 언제나 완벽하고 변함이 없으며 어떤 자비도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 법에 의해 사람들을 판단하고 구속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언뜻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조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영적으로 살아있으면 우리의 죄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다루는 율법으로 인해 우리에게는 아무런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몰랐을 때는 두려움도 죄도 없었는데, 율법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이죠. 율법의 기능은 분명합니다. 율법으로 인해 가려져 있던 죄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 죄로 인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몽학선생(초등교사)’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몽학선생이란 당시 헬라 문화에서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인도자를 의미합니다. 아이가 성인이 되면 몽학선생의 역할이 끝나는 것입니다.
율법이 몽학선생과 같다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죄로 인해 죽게 만드는 것이죠. 성령께서 우리를 책망하실 때, 우리는 이러한 죄에 대하여 더 이상 가능성이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죄의 가책은 율법으로 인한 두려움과 절망을 가져옵니다. 이제 자신의 인생은 ‘죄 아래 팔린’(롬 7:14) 것을 알게 됩니다. 죄악된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보입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죄의 무서움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다고 완벽하게 관계가 회복되거나 완전하게 순종하게 된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누차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을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챔버스의 다음 글이 쉽지 않습니다.
“율법이 ‘만약’이라는 단어와 함께 올 때 우리는 율법의 권능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만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을 강요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에 순종하지 않을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의미입니다. 흥미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하심으로 율법에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을 강요하신다면 율법은 전혀 무의미하며 어떤 능력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상당히 유동적이라, 어떤 때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삶을 원하지만 어떤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 두시길 원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순종’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할 때 율법으로부터 오는 모든 강박이 사라집니다. 마음을 다해 주님을 순종하기로 선택할 때 하나님께서는 주의 모든 전능하신 능력으로 가장 멀리 있는 별과 바다의 마지막 모래알까지도 동원하여 우리를 도우십니다.”
스캇 솔즈의 [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에서, 어제 나누었던 잭 밀러의 유명한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힘내라! 당신은 당신이 상상한 것보다 더 나쁜 죄인이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희망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왜 이것이 좋은 소식인가? 어떻게 해서 우리가 ‘상상할 것보다 더 나쁜 죄인’이라는 사실이 ‘힘낼’ 이유가 될 수 있는가? 다음 두 문장이 당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는 전환점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나아가,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무시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치명적인 죄인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 율법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간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순종하기로 결심할 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죄악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율법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율법의 권능 앞에 자신을 맡기지는 마십시오. 율법이 아닌, 복음이 필요함을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십시오. 이때 우리는 율법에서 죽고 복음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