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고전 15:10
한 줄 노트
-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들리는 말이, 실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 겸손은 하나님과 우리 관계의 엇나간 매듭을 푸는 단초가 됩니다.
묵상질문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쁜 죄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훨씬 많이 받고 있음을 믿으십니까?
묵상 레시피
(누가복음 7:36-50)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4)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3)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고린도전서 15:10)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은 누구였습니까? (37-38절)
- 바리새인은 그 여인을 어떤 사람으로 규정합니까? (39절)
- 예수님의 눈에 바리새인과 여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44-46절)
- 예수님은 여인을 어떤 사람으로 규정합니까? (47-48, 50절)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37절)
여인은 이미 사람들로부터 ‘죄인’으로 규정된 존재였다(39절). 향유 옥합의 가격은 매우 비쌌다. 옥합은 일단 한 번 열면 다 소모해야 했으므로 여인에게는 큰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여인은 감히 예수님 앞으로 나와 마주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뒤’로 선다(38절). 이는 죄인임을 인정하는 여인의 겸손과 예수님을 따르려는 단호함이 동시에 내포된 암시이다.
만일 선지자라면(39절)
예수님을 초청했던 이는 ‘한 바리새인(헬, 톤 파리사이온)’이었다(36절). 이는 ‘바리새인들 가운데 한 명’임을 뜻하며 그의 초대가 순수한 의도만은 아니었음을 나타낸다. 그는 예수님이 ‘선지자’일지 모른다고 여겼으나 여인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는 모습 때문에 그 생각마저 거두려 한다.
빚진 자(41절)
‘빚진 자(헬, 크레오페일레타이)’는 필요에 의해(헬, 크레) 즉, 궁핍함으로 어쩔 수 없이 진 빚을 의미한다. 여인은 ‘과거의 죄가 빚이 되어 이웃들에게 죄인으로 낙인찍혀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재’ 여인이 어떠한 상태인지 알고 계셨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44절)
원어 성경에는 ‘네 집에’를 강조하는 형태로 쓰였다. ‘네 집’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예를 다한 것은 ‘여인’이라며 책망하신 것이다.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48절)
42절에 사용된 ‘탕감하다(헬, 카리조마이)’와는 다른 표현이 사용되었다. ‘사함(헬, 아페온타이)’에 쓰인 헬라어는 ‘-로부터 떼어 보내다’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여인을 억누르던 죄와 주변의 시선, 비난, 낙인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신다. 더 이상 여인은 죄인의 신분이 아니며 온전한 용서를 받았다.
1. 겸손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교만
오늘 묵상이 흥미로운 것은 ‘겸손처럼 보이는 교만’과 ‘교만처럼 들리는 겸손’을 비교해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챔버스는 365일 묵상을 통해 스스로 ‘거듭났는지’ 물어보라고 말합니다. 이 물음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종 겸손한 척하며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거룩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신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라고 할 때, 이 뜻은 ‘주님, 주께서 저를 구원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러한 말이 일견 사람들 앞에서는 겸손한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완고한 마음이라는 것이죠.
계속해서 자신의 불가능을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하나님께서 바꾸실 수 없다고 비방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말씀하시는데, 겸손을 가장한 우리의 자아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4월 20일에 “감히 걱정함으로 하나님을 모욕합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함께 묵상했던 내용을 보며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볼까요?
우리의 능력을 보면 의심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대하여는 ‘아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만 평가됩니다. ‘제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라는 말은 겸손하게 들리지만 무척 교만한 말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이 일에 대한 기준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에게 있으니 말입니다
…
걱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는 ‘나에게는 한 번도 좋은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어’라고 말하면서,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성품을 헐뜯으면서 그렇게 합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 주님은 이렇게 질책했습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6)
우리의 부족한 모습과 죄 많은 심령을 인정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이러한 가난한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다음에도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면, 자신의 아집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
나에게 주신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은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속죄의 은총을 베푸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 교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겸손
반면에 사람들에게는 교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하는 겸손한 고백이 있습니다. 챔버스에 의하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제가 구원받았음을 알며 거룩해진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겸손한 자세입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고백은 조금도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이 신실하심을 인정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위선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고, 주님만이 우리 삶의 전부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구속하신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겸손과 교만이라는 반대되는 개념 앞에서 생각해야 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누구 앞에 진실해야 하는가?’를,
둘째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면, 기꺼이 덜 중요한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캇 솔즈의 [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에 보면 겸손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을 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덜 생각하는 것이다.” …
겸손은 자신이 감정적으로 빈곤하며 엉뚱한 곳에서 그 빈곤을 채우려고 해왔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할 때 시작된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는데 지쳤다고, 자신감을 얻기 위해 항상 이기려고 하고 수시로 남들을 조롱해 오던 삶에 지쳤다고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겸손을 향한 첫걸음이다.
이런 종류의 인정은 기쁨과 자신감으로 가는 문이다. 이것은 진정한 겸손과 진정한 자존감, 건강한 자존감으로 가는 문이다. 이런 인정을 통해 자신을 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덜 생각하게 될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같은 인간들을 향한 사랑과 친절이 싹틀 공간이 생긴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 사람들에게 교만하게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자존감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매순간마다 지지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잭 밀러라는 사람이 아주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힘내라! 당신은 당신이 상상한 것보다 더 나쁜 죄인이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희망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확신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때로 사람들에게 교만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