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
고전 10:31
한 줄 노트
-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모든 사람보다 작은 자임을 인식하며 섬기고 사랑하는 자리에 있을 때, 성화의 진보가 일어납니다.
묵상질문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누구도 당신의 의를 알아주지 않을 때, 상처받지 않고 묵묵히 견디며 일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묵상 레시피
(골로새서 3:22-25)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0:31)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바울은 육신의 상전들을 어떻게 대하라고 권합니까? (22절)
- 바울은 성도들이 일상에서 어떻게 일하라고 권합니까? (23절)
- 사람과 일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무엇으로부터 기인합니까? (24절)
- 모든 사람들이 기준으로 삼을 것은 무엇입니까? (25절)
육신의 상전들에게(22절)
바울 당시 성도들 중에는 종, 노예 신분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바울은 ‘모든 일에, 순종’하라고 권한다. 그렇다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품위, 신앙을 포기해야 할 일들까지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상전들에 ‘육신의’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잠정적인 질서일 뿐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눈가림만 하지 말라’고 명한다. ‘주께 하듯 하라’고 권한다. 종의 일, 세상 질서 가운데 행하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본다면 새로운 관점으로 새로운 사명을 보게 된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25절)
로마 노예들에게는 인권이 없었다. 악한 주인들은 그들의 노예를 물건처럼 대하며 징계와 징벌, 폭력으로 통제하려 했다. 노예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불의’의 거론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세상의 법은 노예들을 포함하지도, 보호하지도 않지만 하나님의 법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주인에게도 노예에게도 각각 불의에 대해 물으실 것이다.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는 말은 ‘차별, 불공평’이 없다는 뜻이다. 성도는 매사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법대로 반응한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법이 적용되지 못할 대상이나 범위는 없다.
인간적인 요소 제거하기
오늘 묵상은 챔버스가 그 동안 강조해왔던 내용들을 가장 함축적으로 잘 설명합니다. 첫 문장이 그렇습니다.
“성육신의 위대한 기적은 평범한 유년시절로 이어집니다. 변화산 상의 위대한 기적은 귀신 들린 골짜기에서 사라집니다. 부활의 영광은 해변에서의 아침 식사로 이어집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의 일상으로 이어짐을 말해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가 나타나는 곳은 바로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동안 챔버스는 수없이 우리 신앙의 오류를 지적해 왔습니다. 신앙인들의 잘못된 영웅심은 ‘놀라운 경험’을 사모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진짜 영웅이 되는 것과 ‘영웅심을 느끼는 것’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영웅심이란 누구나 다 알아주는 대단한 위기를 돌파하는 과정을 꿈꾸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의 영웅이 되는 것은 “보는 사람도 없고 조명도 없으며 아무도 관심조차 보여주지 않는 때 매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지내는 것” 입니다.
영웅심이란 모든 사람에게서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일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오로지 성숙한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만이 드러납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묵상하면서 저에게 생긴 소망을 교인들과 여러 차례 나누었습니다. 나도 주님처럼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어야겠다! 그런데 이러한 소망을 나누는 것조차 참 미성숙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찢어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된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런 소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아직도 마음속에 주님의 영광을 나의 것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의 단순한 결심이나 의지가 아닙니다. 이러한 결심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지조차 전적으로 성령님께 양도해야 합니다. 며칠 전 말씀에서 챔버스는 이것을 ‘영적 훈련’이라고 말했습니다. 영적 훈련이란 나의 의지와 영역이 점점 줄어들고 성령님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성숙한 성도는 위대한 일을 위해 부르심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나 능력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우리를 가장 철저하게 인간적으로 만드시고 또한 전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동시에 주님의 것으로 만드시는 분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십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계신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만지시는 분이 주님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요?
[오스왈드 챔버스 기독교의 진리]에 나오는 글입니다.
주님은 극히 평범하고 천한 것들을 취하셔서 고결하고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매일 되풀이되는 평범한 삶을 고결하게 승화시키십니다. 복음의 능력은 가장 평범한 일상에서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비천한 것이 악한 것은 아닙니다. 소박한 것이 깊이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먹고 마시기, 걷기 등은 일상의 소박한 부분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입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일들을 하며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러한 비천한 일들을 하셨습니다. 당신이 성도라면 하찮은 일을 통해 고결한 성품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작은 자임을 깊이 느끼지 못한다면, 성화의 역사에서 한 걸음 전진했으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도의 삶은 성공이 목표가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신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역자들의 진정한 목표는 성공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교회 안에서 열심을 가진 사역자들이 다투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열심이지만, 어느 순간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와 다투는 핵심 이유는 ‘자신의 의’를 증명하기 위한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역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의가 나타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의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불분명한 채로 사역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근본적인 이유 역시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관점이 중요한데, 그 관계가 사라지니 사람들의 평가가 제일 우선순위가 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증명되는 곳은 우리의 실제적인 삶과 인간관계입니다.
“그러면 공동체의 각 지체에게 그가 있어야 할 자리가 주어집니다. 그 자리는 가장 성공적으로 자기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 가장 잘 섬길 수 있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디트리히 본회퍼의 [성도의 공동생활] 중에서)
챔버스가 오늘 묵상에서 진정한 성도의 삶에서 추구해야 할 것을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성도의 삶의 평가는 성공이 아니라 현실적인 인간의 삶에서의 신실함입니다. 우리는 사역에서의 성공을 목표로 삼으려고 하겠지만, 진정한 목표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