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갈 2:20
한 줄 노트
-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분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믿음은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 담대히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 체험이 믿음의 바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체험은 단지 믿음이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묵상질문
체험에 만족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삶은 등한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묵상 레시피
(빌립보서 4:4-9)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갈라디아서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바울이 성도들에게 명한 것은 무엇입니까? (4절)
- 바울이 염려 대신에 권면한 것은 무엇입니까? (6절)
-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어떻게 지켜질 수 있습니까? (7절)
-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에게는 어떤 모습들이 보입니까? (8-9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절)
바울은 ‘주 안에서(헬, 엔 퀴리오)’, 주님에 대한 소망으로 인해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항상(헬, 판토테)’이란 뜻은 ‘예외 없는 모든(판) 시간(호테)’을 의미한다.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바울의 상황 역시 기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며 여러 고난을 만났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행16:25). 바울의 권면은 실제 자신의 삶을 본으로 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6절)
‘염려하다(헬, 메림나테)’는 자신이 바꾸거나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쓸데없이 근심하거나, 미리 근심하여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을 뜻한다(마6:25-28,31,34, 10:19, 눅10:41, 12:11,25).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일이다. 성도들은 염려대신 기도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기억하고(기도, 헬, 프로슈케), 구체적인 필요를 하나님께 간구(헬, 데에세이)한다.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절)
기도와 간구에 대한 가장 큰 응답은 ‘하나님의 평강’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헬, 프루레세이).’ 이는 군대 용어로 ‘파수꾼이 성읍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성실히 지키는 것’처럼 하나님의 평강이 당신 자녀들의 마음과 생각, 감정을 세심히 지켜 주신다는 의미다. ‘마음(헬, 카르디아)’은 인간의 감정, 느낌, 의지를 의미한다. ‘생각(헬, 노에마타)’은 마음으로부터 발생한 ‘판단, 생각’을 가리킨다. 즉, 마음과 생각이란 ‘인간의 내적 감정, 도덕적 의지, 이성과 판단력 등 내적인 전존재’를 모두 포괄한다.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9절)
‘받고(헬, 파렐라베테)’는 ‘받은 그대로, 손상 없이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해 받는 것’을 뜻한다. ‘행하라(헬, 프랏세테)’는 바울을 통해 받은 가르침과 설교 등을(8절) 몸으로 직접 행하고 성취하는 삶을 가리킨다.
1. 기분에 휘둘리지 않기
오늘 묵상은 ‘믿음과 체험’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기분이나 환경에 휘둘리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관념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면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5월 20일 묵상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기분이란 기도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발로 차버려야 떠납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가 다가옵니까? 오늘 묵상 첫 문장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기분과 싸워 이겨서 자신을 주 예수님께 완전히 드려야 합니다. 보잘것없는 사소한 체험에서 나와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십시오.”
진정한 믿음은 싸우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기분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레몬심리의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라는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차이만 있을 뿐이지 누구나 기분을 드러낸다. 내 기분은 내 선에서 끝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겉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기분과 태도는 별개다. 내 안에서 저절로 생기는 기분이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면, 태도는 다르다. 좋은 태도를 보여주고 싶다면,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
기분(mood)은 때때로, 강력한 힘으로 우리의 마음을 깊은 스올로 끌어 내리기도 하고, 의심과 두려움으로 고통받게 만들기도 합니다. 기분이 우리 신앙의 태도가 되지 않게 주 예수님께 모두 맡기는 것이 기분과 싸워 이기는 방법입니다.
기분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어떤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며, 자신의 희생을 자랑하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기분에 휘둘리지 않고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살기
이러한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일회적인 체험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번 강조합니다. 구원의 은혜는 한 번이면 족하지만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훈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힘을 다해야 합니다. 기도회나 책 속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체험이 아니라 체험을 주신 분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체험이 진정한 의미를 가질 때는 그 체험을 주신 주님을 향한 믿음이 온전할 때입니다. 체험에 만족하면 그 체험을 붙잡고 안주하지만, 체험을 주신 분께 집중하면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치열하게 세상과 싸우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A. W. 토저의 [하나님을 체험함]이란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믿음 자체가 공로는 아니다. 모든 공로는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께 있다. 믿음은 눈을 돌려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죄로 인해 영혼의 눈이 왜곡되어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불신앙이란 하나님이 계셔야 할 곳에 자기 자신을 올려놓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보좌 위에 내 보좌를 두리라”고 말했던 루시퍼의 죄에 버금가는 악한 죄다. 믿음은 안이 아니라 밖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럴 때 삶 전체가 질서를 회복한다.
그렇다고 ‘체험’을 하찮게 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이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 주님을 우리 마음속에 모실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믿음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스왈드 챔버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나오는 글이 도움이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끊임없이 ‘네게 믿음이 있다면 삶으로 증거하라’고 주장한다. 체험은 절대로 내 믿음의 바탕이 될 수 없다. 체험은 단지 내게 믿음이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죄로부터의 놀라운 구원을 체험했고 성령 세례를 받았다. 이 체험들은 단지 공상이 아니라 실제이다. 우리는 이러한 체험을 한 이후 날마다 놀랄 정도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새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두는 대신에 체험에 두게 된 것이다. 민일 이러한 위험에 빠지면 우리의 믿음은 삐뚤어지면서 그릇된 믿음으로 전락하게 된다. 성령 세례를 받은 초대 교회의 제자들은 그들이 가르친 교훈과 일치된 삶을 살았다. 즉, 성령님을 받은 그들이 살아 있는 서신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내가 믿은 바를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참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즉, 체험은 자신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의 믿음보다, 우리의 체험보다 무한하게 크시다.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향해 가진 믿음의 선상에서 발생한다. 당신은 당신을 아는 자들에게 당신의 체험을 간증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즉, 예수님을 향한 당신의 믿음으로 인해 ‘지금의 당신’ 이 되었음을 증거 할 수 있는가? 당신은 예수님께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당신을 통해 그 일들을 다 이루셨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