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후 5:17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한 줄 노트
- 빛 가운데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보고 괴로워할 수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고민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합니다.
묵상질문
당신의 삶에서 거듭남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죄성이 보여 괴롭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빛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묵상 레시피
(고린도전서 15:9-10)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후서 5:17)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바울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9절)
- 바울이 사도될 수 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10절 상반절)
- 바울이 사도직을 감당할 수 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10절 하반절)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9절)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전 15:8절).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사도로 부름 받았다. 그럼에도 바울은 낮은 자리에서 겸손히 이 사역을 감당한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던 과거를 똑똑히 기억했다.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10절)
‘헛되다(헬, 케네)’는 ‘공허한, 내실 없는’이란 뜻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내실 있는 은혜 즉, 불가항력적인 은혜였다고 말한다.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자격 없는’ 바울이 사도로 세워질 수 있었다. 바울은 10절에서 3번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언급하며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하나님 은혜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나와 함께 하신’이라는 표현은 ‘내게 주신’ 하나님 은혜에 바울이 긴밀히 결합되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자신을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시고 사도로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부름 받은 것에 ‘더 많이 수고’했다(할 수 있었다).
진정한 거듭남
우리를 종종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있습니다. 스스로 거듭났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진정 거듭난 삶을 살고 있는가? 누군가의 삶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이 거듭났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거듭남에 대하여 아주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 즉 이전 사람은 사라지고 아주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럼 그러한 새로움의 증거는 무엇일까요?
“구원의 체험이란 당신의 실제 삶에서 모든 것이 정말로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더 이상 과거에 사물을 보던 대로 보지 않습니다. 당신의 소망은 새롭게 되었으며 옛것들은 힘을 잃었습니다.”
챔버스가 이야기한 이러한 거듭남의 증거는 다른 말로 하면 ‘세계관’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프레임’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세계관이란 바로 세상을 보는 관점, 즉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소망이 자신의 소망이 됩니다. 오늘 묵상에서 챔버스는 다시 ‘시금석’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금석이란 진위를 가리는 기준입니다. 이전 묵상에서 챔버스는 ‘일상의 지루함’이 우리의 믿음이 어떠한지를 가리는 시금석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했을 때 우리가 누구인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지루함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이 진정한 성도의 모습이라고 말이죠.
거듭남의 진실성을 가리는 시금석은 ‘가치관의 변화’에 달려 있습니다. 거듭나기 이전과 이후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아직도 옛것을 추구하고 살아가면서 거듭났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변하지 않으면서 거듭났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거듭나기 전 기도가 자기중심적인 내용이었다면, 거듭난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용서받기 위해 기도했다면, 거듭난 성도는 형제와 자매를 용서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그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 자신이 가장 놀라야 할 것입니다. 챔버스의 글이 흥미롭습니다.
“만일 당신이 거듭났다면 성령은 그 변화를 당신의 실제 삶과 생각 가운데 나타내실 것이며, 위기가 찾아왔을 때 당신은 당신 안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로 인해 가장 놀라게 될 것입니다.”
혹시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삶의 고난과 위기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 오히려 감사 기도를 드리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 말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의 원문 제목이 “변화된 삶”(The transfigured life)입니다. 여기서 ‘변화’, 즉 ‘transfigured’라는 말은 변화산에서 변모된 주님의 모습을 말할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육적인 모습이 가려지고 신적으로 변모된 모습 말입니다. 분명히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우리도 거듭남의 구원을 체험했다면, 분명히 변모된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능력으로 왔을 리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변화가 찾아왔다면,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챔버스가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빛 가운데 설 수 있습니까? 아니면 손을 저으며 당황스러워합니까? 성령에 의해 내 안에 이루어진 구원은 나를 완전히 자유롭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심같이 내가 빛 가운데 행하는 한, 주님께서는 내게 책망할 것을 보지 못하십니다.”
진정한 거듭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역사하고 계심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면 주님께 책망 받을 말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러한 기준에 합당할까요? 사도 바울 조차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고백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거듭난 후 사도로서 사역을 감당할 때 한 고백입니다. 그가 가장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자신 안에 있는 죄성으로 인해 고민했던 것이죠.
그런데 저는 오늘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 책망받을 것이 없다고 해서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조명 아래서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깨닫고 고민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요청하며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죄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책망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신앙의 역설입니다. 거듭난 자가 자신의 부족함을 볼 때, 도리어 하나님께 책망받을 만한 것이 없다니 말입니다.
당신에게는 그러한 거듭남의 명확한 증거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자신이 보여서, 하나님께 도우심을 요청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당신이 빛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점점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자유함을 느끼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을 원하시는 분이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