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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최고봉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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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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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노트

  • 일반적인 사건이 나의 일이 될 때, 그 일을 통해 나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 당신의 삶이 지금 믿음의 프로그램 속에 있다면 잘 통과해야 합니다.

묵상질문

지금 처한 상황 가운데 믿음으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당장 그렇게 하십시오.


묵상 레시피

◆마가복음 5:21-23, 35-43 + 요한복음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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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21-23, 35-43)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1:26)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22절)
  • 그가 예수님께 간곡히 요청한 것은 무엇입니까? (23절)
  • 가던 중 시간이 지체되자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35절)
  •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36절)
  • 예수님이 그의 집에 가시자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38-43절)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22절)
예수께 찾아온 야이로는 ‘회당장’이었다. 회당에는 약 10명의 관리자들이 있었고, 그 중 세 사람 정도가 회당장이었다(행13:15). 그들은 안식일에 성경을 낭독할 이들을 선정했고, 공중 예배를 주관하며 예배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했다. 회당장은 백성들에게 인정받는 신앙과 덕망이 있는 자들이 선출되었으며 세습직은 아니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23절)
회당장이 예수의 발아래 ‘엎드렸다(헬, 피프테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사정하는 경우’(마18:29)나,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엎드린 경우(마2:11), 혹은 초자연적 존재 앞에 엎드리는 경우(계19:10)에 하는 행동이었다. 그가 예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고 경외심을 표현한 것은 긴박한 사정 때문이었다. 그의 어린 딸은 죽음을 막 앞두고 있는 심각한 환자였다. 야이로는‘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어’달라고 요청한다. 헬라어 문법(분사 부정 과거형, 가정법 부정 과거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야이로가 긴박한 상황 가운데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왔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예수님이 ‘한 번’만 와주셔서 ‘단 한 번만’ 손을 대주시면 병이 나을 거라는 순수하고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35절)
야이로나 딸의 부고를 알리러 온 사람들도 예수께서 ‘죽은 자 까지’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없었다.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지 못한 것이다. 야이로는 ‘시간 상 이미 늦었다’고 여겼다.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 하신다. 마가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음,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인간의 죽음 등 인간의 힘으로 해결 불가능한 주제’들을 통해 우리가 겪는 현실 문제들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물으며 ‘믿음의 문제’를 제시한다.


◆ 묵상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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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이 있는가?

오늘 묵상의 원문 제목은 “믿음의 프로그램”(Programme of belief)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소유할 수 있도록 문제를 통해 훈련시키십니다. 오늘 본문은 아주 유명한 사건 가운데 주님이 물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와 마르다를 향해 부활을 믿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믿음의 프로그램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는 것과 상반된 일을 통해 우리의 믿음 상태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실하게 믿고 따랐던 가정에 ‘죽음’이라는 문제를 던지셔서 그들이 믿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테스트하시는 것입니다.

쉐인 클레어본이 쓴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안전하다거나 크리스천이 근사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자랄 때는 크리스천을 선량하고 정직한 시민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분은 나를 더 많은 곤경에 빠뜨리는 듯하다. 키르케고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신에 흠모하기 원하는 모습은 나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예수로부터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싶은 줏대 없는 사람들이 꾸며낸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믿음’의 문제는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제 삼자의 입장이 아닌 지극히 주관적인 관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경을 보면 마르다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계셨더라면 오라비 나사로를 고쳐주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든지 행하실 것이라는 것도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사건이 자신에게 일어날 때, 가장 친밀한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이 직접, 자신의 삶에서 ‘믿음을 통해’ 증명되도록 프로그램을 가동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믿음의 프로그램 속에서 우리가 답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을 의심케 하는 시련들은 무엇입니까? 마르다처럼, 미래만을 향했던 당신의 믿음이 당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당신을 사로잡는 말씀으로 인해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믿음으로 바뀌었습니까?”


2. 이것이 믿음이다

오늘 묵상은 믿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나’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믿느냐가 믿음을 좌우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순례자의 노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를 붙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신념과 확신을 신뢰하려는 위험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언젠가 반드시 무너진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것에 우리의 믿음을 두어야 한다.

하나님을 의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체험했던 사실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그분의 존재 자체를 인격적으로 의식하는 것을 말한다. … 아무리 강한 세력이라도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수 없다. 사탄 역시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든 원수로부터 절대적으로 안전하다. …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만 의지한다면 그 어떤 세력도, 사탄의 공격도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신실하게 주님을 의지하는 한, 우리는 영원토록 안전하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믿음을 이렇게 정의 합니다.

“믿는 것은 전적으로 맡기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믿는 것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예를 들어서 과학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과학적이지 않은 것을 먼저 배제할 것입니다. 인생에서 자신이 정해놓은 규칙이나 신념이 있다면,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믿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고려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에 나 자신을 맡기면, 영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오로지 그분의 지배를 받기로 결심합니다.”


마르다에게 물으셨던 주님은 우리를 마주 대하고 똑같이 물으실 것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물음에 대하여 마르다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7절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얼굴을 맞대고 물으실 때, 우리도 자연스럽게 마르다처럼 믿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마주할 때, 이 믿음이 숨을 쉬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동안 주님을 신뢰하지 못했던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지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프로그램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도 믿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어제 묵상과 연결해 본다면, 믿음의 과정이 ‘고난’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죠. 우리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고난의 문제를 직면하기 전까지는 좀처럼 진지하게 주님을 마주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 쉽게 이야기했던 믿음이 얼마나 부끄러운 고백이었는지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스스로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혹시 내가 처한 상황이 ‘믿음의 프로그램’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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