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6:13
한 줄 노트
- 참 거룩과 참 경건은 속죄의 삶을 체험하는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것입니다.
묵상질문
당신은 오늘도 속죄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역사에 감동합니까?그렇다면 여전히 겸손한 하루를 살게 될 것입니다.
묵상 레시피
(베드로전서 2:21-25)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로마서 6:13)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22절)
- 예수님은 어떤 일을 당하셨습니까? (23절)
- 예수님은 왜 그 일을 당하셨습니까? (24절)
-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5절)
- 예수님은 우리를 왜 부르셨습니까? (21절)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24절)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릴 이유가 없으신 분이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몸소 지시고 나무에 달리셨다. ‘우리가 죄의 상처를 앓고 있을 때, 그가 대신 앓아줌으로써 우리는 치유를 받은 셈이다.’ 이 일에는 모욕과 고난과 고통이 동반되었다.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25절)
그러나 인내하며 순종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 생명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감독 아래 제 구실을 하게 되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우리는 이제 주님으로 인해 두려움과 실패, 고난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다. 성도들은 고난 받으신 주님을 따라 각자 처한 상황 가운데 그 자취를 따르도록 부름 받았다(21절)
속죄를 중심으로
오늘도 챔버스의 묵상글을 통해 중요한 신학적 주제인 ‘속죄’에 대하여 배우게 됩니다. 무엇보다 ‘속죄’의 사건이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하게 할 수도, 거룩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죄를 속량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구원할 능력도 없습니다. 더러운 것을 깨끗케 할 수도 없으며, 거룩하지 않은 것을 거룩하게 할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가 오로지 믿어야 하는 것은 이 놀라운 속죄를 이루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놀라운 사실을 계속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실감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이죠. 속죄에 관하여 우리가 기억해야할 중요한 문장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믿는 것’입니다.” (the great need is not to do things, but to believe things.)
김진두 목사가 쓴 [존 웨슬리의 생애]에 보면, 웨슬리가 미국으로 가는 여행 중 풍랑 가운데 두려움으로 떨고 있을 때,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모라비안 교도들에게 감동했던 일기가 소개 되어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기도하고 성경 구절을 암송했지만 마음속의 불안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비바람이 배를 때리는 중에 배보다도 훨씬 높은 파도가 존 웨슬리의 머리를 뒤집어씌우고 온몸을 휘감고 쓰러뜨렸다. 시커먼 하늘은 번갯불에 갈라지고 천둥이 바다를 때리고 큰 돛이 찢어졌다. 존 웨슬리와 동료들은 바람에 넘어져 쓸려가 버렸다.
이때 바닥에 넘어진 메도디스트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평화로운 찬송 소리를 들었다. 바로 곁에서 독일 모라비아교인들이 저녁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라비아교인들은 비에 젖고 바람에 넘어지면서도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존 웨슬리는 그들을 계속 눈여겨보았다. 같은 시간에 영국인들은 죽음의 공포에 떨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러한 영국 교인들의 모습은 계속해서 찬송을 부르는 독일 모라비안교인들의 모습에 비해서 너무나 달랐다.
존 웨슬리는 모라비아교인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예배를 막 끝낸 그들에게 다가가 한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두렵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네,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존 웨슬리가 다시 “당신들 중에 있는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네, 우리들 중에는 여자들이나 어린아이들도 죽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존 웨슬리는 죽음의 공포에 질려 벌벌 떨며 울고 있는 영국 교인들에게 가서 “저기 모라비아교인들을 좀 보시오.” 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영국 교인들과 모라비아교인들의 분명한 차이점을 말해 주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구별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하나의 ‘체험’이 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회적 체험 위에 우리의 믿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매일 그 믿음을 새롭게 붙잡는 것입니다. 믿음은 ‘체험’이 아니라, 매일 역사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체험은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기는 하지만, 주관적 체험을 절대화하면 교만해지고 자기중심적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챔버스는 “구속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위대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그 구속 위에 세워야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경험에 믿음을 세우면, 자신이 기준이 되어 결백과 거룩을 판단하게 됩니다. 이 순간 우리는 비성경적이 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도 맺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구속의 사건에 근거하지 않는 경건은 격리된 삶을 살아가는 자신에게는 유익이 될지 모르지만, 구속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에게는 무익한 것입니다. 기억하시나요? 7월 10일과 12일 묵상에서 챔버스가 과거의 수도원주의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이야기 했던 것을 말입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자신의 영성을 키우고 거룩함을 유지하려고 했던 시도들이 자신들의 경건을 유지했을지는 모르지만, 놀라운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을 살아내게 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전제로 하지 않는 경건에 주의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지나친 경건이나 은둔생활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속죄’가 매일매일 경험되지 않는다면, 경건과 거룩은 오로지 ‘자기애’로 변질될 뿐이며 곧 영적 교만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준이 놀라운 ‘속죄의 행위’에 근거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체험을 예수님을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다는 이 놀라운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행위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유전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경건했고 거룩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역사와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 노력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거룩이 주님의 거룩에 기초한다면, 하나님께서 베푸신 용서에 따라 우리는 관용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따라 자비로울 것입니다. 챔버스는 ‘속죄’와 ‘순종’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순종은 속죄에 모든 신뢰를 두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순종을 통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을 곧바로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속죄의 은혜에 대하여 우리가 의지적으로 동의할 때, ‘순종’이라는 이름의 삶이 나타납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렇게 순종하는 자만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쁨은 순종한 자만이 경험하는 특권입니다. 이 놀라운 순종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속죄의 사건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만이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점검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삶을 거부하는 경건을 경계하십시오.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속죄의 영역으로 인도하십시오. 속죄가 삶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