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게로 오라
마 11:28
한 줄 노트
- 우리가 진짜 성도라면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말씀이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에도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시고, 우리가 실망하고 떠나갈 때에도 여전히 손 내밀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묵상질문
당신은 주님께서 내미시는 그 손을 잡았습니까? 아니면 놓지 못한 것으로 인해 아직도 주저하고 있습니까? 놓아야 할 것을 깊이 묵상해봅시다.
묵상 레시피
(요한복음 6:36-40)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하나님은 예수님을 왜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38절)
-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39-40절)
-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며 요청하십니까? (37,40절)
- 요청에 응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6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38절)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에 결코 불순종한 일이 없으셨다(마26:39). 이는 유대인들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을 직접 ‘보고(헬, 호라오)’도 계속하여 ‘믿기’를 거부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 이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이며(요10:30)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아버지의 뜻임을 강조하신 표현이다. 하나님 중심 신앙을 외치는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곧 하나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39절)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선한 목자로서의 사명을 기억나게 한다(10:10-11).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사명을 완수하셨다(19:30). 택하신 자들 중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려 예수님은 온전한 순종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게 될 것이다(40절).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는 요한복음 19:37은 스가랴 12:10절을 인용한 것이다 . “내가,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비는 영’을 부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은, 나 곧 그들이 찔러 죽인 그를 바라보고서,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울 듯이 슬피 울며, 맏아들을 잃고 슬퍼하듯이 슬퍼할 것이다(새번역).”
1. 진짜 성도
구원의 보편성과 독특성의 문제는 기독교 신학의 오랜 논쟁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주셨는데, 이 보편성이 ‘주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는다는 대목에서 아주 편협한 사랑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묵상에서는 아주 보편적인 은혜를 다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위에 오셔서 ‘화해’(reconciliation)를 이루신 것이 구원계획이라는 것이었죠. 그런데 오늘 말씀의 원 제목은 ‘그리스도의 배타성(유일성)’(The exclusiveness of Christ)입니다. 본문 말씀은 ‘내게로 오라’는 마태복음 11장 28절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보편성과 배타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보편성을 ‘일반은총’이라고 말한다면 ‘배타성’은 개인적 특별 은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끼는 말 중에 하나가 ‘주님께만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성도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됩니다. 우리가 진짜 성도라면, ‘주께 오라’는 말씀이 어떤 걸림돌도 되지 않지만, 만일 가짜 성도라면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여러 가지 논리를 가지고 따지거나 입씨름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주저하고 있다면, 그분을 온전히 우리 삶의 구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 안에 자아가 살아 있어서 온전히 순종하지 않으려는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작은 영적 완고함이라도 당신에게 남아 있는 한,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큰일을 부탁하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당신에게 하라고 하신 모든 것은 단지 ‘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살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는 ‘관계’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거룩함이나 겸손 자체도 추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로지 생명 되시는 주님만을 추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매일 세상에 나가서 선하게 살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매일 매 순간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와 은혜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포기’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완전히 가난해져서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는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을 때, ‘내게로 오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2. 주님의 인내
오로지 주님께만 나아오라는 배타성은 끊임없는 인내로 우리를 기다시리는 하나님의 ‘초청’과 연관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초청장을 보내시지만, 우리 안에 강력한 성령의 역사와 결단이 있을 때에야 이 초청에 응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이 주님께로 오는 것을 막는 그 어떤 것이라도 도끼로 그 뿌리를 잘라내야 한다고 알려주십니다. 당신이 이 한 가지를 기꺼이 하기 전에는 절대로 전진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주님의 초청이 결코 강압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주님께로 가는 것에 장애가 되는 것을 알려주시지만, 우리의 의지적 결단이 없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챔버스의 표현에 의하면,
“성령께서는 당신 안에 있는 쓴뿌리를 알려주시지만, 당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성령께서는 그 쓴뿌리를 제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영적 완고함’은 주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입니다. 영적 완고함으로 인해 우리는 성령님의 계시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예수의 길]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실 때에는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 예수님, 저를 지배하는 모든 것을 지금 내려놓습니다. 제 안과 바깥에서 날뛰는 수많은 두려움을 떨쳐 내도록 도와주소서. 온갖 불안감과 낮은 자존감을 제하시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주님께서 저를 빚어 주소서.
주님의 침묵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길 원합니다. 거기서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저를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힘과 용기를 얻어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을 듣겠사오니 저와 함께하여 주소서. 저를 당신의 집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신비를 더 깊이 깨닫게 하소서. 지금 그리고 항상 함께하여 주소서. 아멘.”
“내게로 오라”는 말씀을 따라 예수의 길을 걷습니다. 이 길은 주님께서 쓴 뿌리를 제거하시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고, 주님의 손을 꼭 잡고 가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생각과 요구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또 주님을 떠나갑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양팔을 벌리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로지 주님의 손을 붙들기를 여전히 기다리시며 인내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배타성’은 완고함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인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배타성’은 그 어떤 것도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배타성’은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놀라운 기회를 부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