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갈 1:16
한 줄 노트
- 주님께서는 절망의 유전 형질을 소망의 형질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묵상질문
오늘 당신의 삶에서 가장 절망스러운 부분은 무엇인가요? 그 절망 가운데서 소망의 빛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생한 자의 고백입니다.
묵상 레시피
(고린도후서 13:3-5)
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1)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갈라디아서 1:16)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 그리스도는 어떤 면에서 약하면서 강하십니까? (4절 상반절)
- 그리스도의 약함과 강함은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합니까? (4절 하반절)
- 바울은 성도들에게 무엇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말합니까? (5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3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약함과 강함이 공존한다. 예수님의 약하심이 곧 그의 강하심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모습은 그의 약함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 일으켜 세우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셨으며 만물을 다스리신다(빌2:9-11).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믿고 그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도록 자신을 열어 놓는다(롬6:4).’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절망스러울 정도의 연약함과 죄에 대해 승리하는 강한 자가 된다.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5절)
이를 위해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는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지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말한다. 우리의 강함과 능력은 오직 내주하시는 성령으로부터 온다. ‘시험하다(헬, 페이라조)’는 현재 명령형으로 지속적, 반복적, 습관적인 동작을 나타낸다. 매순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삶의 차별성이 어디로부터 오는 지 기억하고 점검해야 함을 뜻한다. ‘확증하라(헬, 도키마제테)’는 금에 속한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불 속에 집어넣는 것을 의미한다.
중생이 의미하는 것
오늘 묵상은 어제에 이어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인 ‘중생의 본질’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났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런 전제가 필요한 것이죠.
(의역)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나에게는 거룩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유전형질을 내게 주십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해 져야 한다’라고 말씀만 하셨다면, 이 말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절망스럽겠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우리 안에 이러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룩함을 가르치실 뿐 아니라, 그 거룩함을 가능케 하는 ‘유전 형질’을 넣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구속’의 의미가 분명합니다.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 안에 있었던 유전적인 성향을 우리에게 넣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선생으로 머물지 않고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 위에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모든 것은 바로 이러한 전제를 기준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내 입장에서 결정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께서 내리신 나의 죄에 대한 판결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의가 왜 중요할까요? 우리의 죄에 대한 판결은 ‘죽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바로 이 판결에 동의하는 순간 우리는 무한한 ‘절망’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챔버스의 묵상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말이죠. 우리가 완전히 가난해져서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영이 절망을 느끼는 순간은 바로 ‘성령’께서 일하시는 시작점이 됩니다.
절망의 영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능력이 시작된다는 것인데,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중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구속의 영적인 기적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 새로운 성향을 넣으실 수 있다는 것이요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절박함이 낳은 기적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가난해져서 주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에게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절박함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기독교가 역설적인 종교인 것은 ‘절망’에서 ‘희망’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할 때, 우리를 뭔가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고난 본성에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책임적 능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실 때,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하셨던 그 순종이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신학적인 문제입니다.
한 사람에 의해 ‘죄의 성향’이 우리에게 들어왔습니다. (이 부분은 어제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한 사람(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유전된 것이 아니라, 죄의 성향이 유전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다른 ‘한 사람’에 의해 성령께서 온 인류에게 들어오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에게도 흠 없는 유전 형질, 즉 ‘중생의 본질’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칼빈을 통해 신학적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성령의 성화시키는 능력]이라는 제목으로 크리스천투데이에 기고한 배본철 교수의 글에 잘 정리가 되어 소개합니다.
존 칼빈(John Calvin)의 성령론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성령은 곧 성화의 영(Spirit of holiness, 롬 1:4)으로서 신자에게 성화시키는 능력(sanctifying power)으로 일하신다는 것이다. 믿음에 의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만나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게 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하시며, 또 우리는 그분의 성령에 의해 살게 된다. 이 같은 중생(regeneration)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는데, 그것은 옛 사람에 대한 억제와 새로운 삶에의 참예이다.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직접 비롯되어 중생의 최후 목적인 본래의 모습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우리가 아직 실제적인 의와는 사실상 상당히 먼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중생을 통하여 죄의 굴레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미 완전한 자유를 지녔기 때문에 육신과 투쟁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이러한 사실이 그들을 계속적으로 시험받게 하는 영원한 전쟁터에 남아있게 하여 그들을 단련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나약함을 깨닫게 하여 줄 수 있다."(John Calvin, [기독교강요] III 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