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한 줄 노트
- 포도주가 되기 원한다면 먼저 으깨져야 합니다. 우리를 으깨시는 주님의 손길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묵상질문
당신도 기꺼이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기를 원합니까? 당신에게서 아직 으깨지지 않은 포도 알갱이는 무엇일까요?
묵상 레시피
(사사기 16:28-31)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31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골로새서 1:24)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삼손은 하나님께 무엇을 부르짖고 있습니까? (28절)
- 삼손은 신전 기둥을 안고 무엇을 결단합니까? (29-30절)
- 성경은 신전 붕괴에 따른 삼손의 사역을 뭐라고 평가합니까? (30절)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28절)
삼손은 두 눈을 뽑히고 감옥에 갇혔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불러내어(25절,히,카라)’ 재주를 부리게 했고, 삼손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히, 카라).’ 삼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은 두 번째다. 그는 레히에서 나귀 턱뼈로 천 명을 죽이고 목이 말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은 샘을 허락하셨다. 삼손은 두 눈을 잃고 죽음 앞에서 응답하셨던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부르짖는다. 삼손은 자신의 힘 근원이 머리털 아닌 하나님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제서야 바로 부르짖게 되었다. 힘을 사용했던 모든 순간의 주체는 하나님이었으며 삼손은 도구일 뿐이었다(15:18).
구하옵나니, 구하옵나니(28절)
의지할 것이 하나님뿐임을 깨달은 삼손은 간곡하게 간청한다. ‘나를 생각하옵소서’, ‘나를 강하게 하사’에는 간절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불변사 ‘나(Na)’가 두 번이나 쓰였다. ‘제발, 청컨대’라는 의미다. 삼손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며 자신을 제물로 서원하며 죽음에 내어 놓는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30절)
삼손은 잉태 전에 선택되었고 준비되었다(13장).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았으며 도구로 부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늘 ‘여인’을 향해 있었다. 삼손은 군사를 소집하거나 전쟁다운 전쟁을 치른 적이 없다. 자기 사명을 망각하고 헛된 삶을 살았다. 그가 힘을 사용한 사건들은 불미스러운 사건들과 잇닿아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바로 깨닫고 ‘죽음’으로 서원한 삼손을 ‘사사’로서 쓰셨다. 성경은 삼손이 죽을 때 죽인 자가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많았다고 평가한다. 구원에 대한 기록임과 동시에 삼손의 삶에 대한 풍자로도 볼 수 있다.
포도주가 되려면
오늘 묵상의 제목은 이미 여러 번 등장한 말입니다.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는 것은 우리가 온전히 부서져야 하나님께 쓰임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묵상의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영적 헌신으로부터 소명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될 때 주께서는 이 모든 것을 옆으로 쓸어버리십니다.”
얼핏 들으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영적으로 헌신하는 부분을 소명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진정으로 올바른 관계에 서 있을 때, 그러한 헌신이 소명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올바른 관계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때때로 지독한 고통을 느끼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하게 됩니다.
계속 반복되는 말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영적 헌신’이나 ‘개인의 거룩’은 부르심과 관련이 없습니다. 거룩하게 헌신할 때의 나는 전혀 으깨지지 않은 포도 알이요, 찢겨지지 않은 빵에 불과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손길을 거부할 때,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지 못하고 여전히 포도 알갱이로 남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으깨시기 위해 우리가 너무나 싫어하는 사람이나 절대로 순복할 수 없는 상황을 사용하실 때 우리는 반대합니다. 우리는 결코 자신의 순교 장면을 스스로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순교 장면조차도 우리가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포도 알이 포도주가 되는 방법은 온전히 으깨지는 것입니다. 포도 알로 남아 있으면 마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채우노라”
괴로움을 기뻐한다는 말은 기꺼이 으깨어 질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부어지는 포도주가 된다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챔버스의 말 가운데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신이 아직 덜 익었는데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으깨셨다면 그 포도주는 분명히 쓴 맛을 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포도나 으깨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엄지와 검지로 붙잡고 으깨시기 시작하셨다면, 우리가 지금 ‘성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쓰임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분을 섬기는데 방해가 되는 인간적 요소를 제거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입니다.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기 전에 우리는 주님의 손에 빚어져야 합니다. 여기서 빚어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 우리는 기꺼이 삶을 하나님께 양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쓰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는 것의 위대함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위하여 유용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포도주는 부어져야 유익이 되고, 빵은 찢겨져야 유익이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바로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마크 듀퐁의 경험]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좋은 비유가 될 것 같습니다.
1998년 여름 어느 날 나는 환상을 보았다. 나는 그 환상 가운데 친구로 보이는 두 사람이 서로 다가서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사람은 아름다운 포장지로 싼 조그만 크기의 선물 박스를 들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그 선물을 받았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그 포장 속에 귀한 것이 들어 있다고 추측한 듯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선물의 포장을 뜯었다. 그 포장 속에는 손으로 만든 조그맣고 예쁜 컵이 한 개 들어 있었다. 값이 나가는 컵이었다. 그런데 그 컵에는 금이 나 있었기에 물을 담아 마시기에는 부적절하였다. 그 친구는 컵에 금이 난 것을 알아차렸다. 선물을 받은 이 친구는 왜 자신에게 금이 간 컵을 선물하였을까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 그 친구는 자신이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 선물을 한 친구가 실망할까봐 애써 표정을 감추었다. 그리곤 그 컵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금이 가서 물을 담을 수 없는 컵을 어떻게 사용할 방법이 없어서 그 친구는 그 컵을 다시 박스에 넣어 다락방에 집어넣었다. 그 장면이 끝나자 다른 환상이 나타났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컵을 가져다주었다. 주님은 조심스레 컵을 받아들고 사랑스런 컵을 바라보았다. 그 컵은 첫 번 장면에서 본 것과 동일한 금이 간 컵이었다.
예수님께서는 환상 속에서 나에게 "너는 이 컵이 왜 나에게 소중한 컵인 줄 아니?"라고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환상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이 컵이 깨어져 금이 간 컵이기 때문에, 이 컵 안에 나의 영광을 담을 수 있단다. 내가 나의 영광을 이 컵에 담으면 깨어진 틈 사이로 나의 영광이 흘러나와 주위 사람들에게로 나의 영광이 흘러들어가게 할 수 있단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일단 자기중심적이 되면 가인이나 사울 왕처럼 제일 좋은 것은 자기가 갖고 하나님에게는 그보다 못한 것을 바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심령이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 최고의 것, 곧 자기 자신을 바치게 된다. 바로 "자신"이라는 깨어진 컵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노력을 바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그분의 위대한 계명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쳐야만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