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 10:3
한 줄 노트
-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주님으로 인해 위로를 받습니다.
묵상질문
주님을 배신하거나 스스로 실족했던 순간이 있었나요?그때마다 찾아오셨던 주님을 생각해봅시다.
묵상 레시피
(요한복음 10:3, 7-12, 26-28절)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예수님은 자신을 무엇에 비유하셨습니까?(7,12절)
- 양들은 누구의 음성을 알아듣습니까? (3,27절)
- 참 목자는 양들을 어떻게 돌봅니까? (9-10,28절)
- 삯꾼 목자는 양들을 어떻게 돌봅니까? (10,12절)
수전절과 요한복음 10장
요한복음 10장은 수전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수전절은 마카비 형제가 유대인을 핍박하던 헬라 왕조에 대항해 승리하고, 성전을 되찾아 성별하여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유대인들은 이 절기에 에스겔 34장을 봉독했다. 참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삯꾼 목자들에게서 자기 양을 구하여 내신다는 내용이다. 예수님은 에스겔 34장이 봉독되는 수전절에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선포하고 계신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로마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할 제2의 마카비, 개선 장군 같은 정치적 메시아로서의 ‘선한 목자’를 기대했다. 마카비 형제의 승리는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유한한 승리가 아니라 영원한 승리, 영원한 생명을 주실 참 메시아시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할 참 선한 목자시다.
양의 문(7절)
당시에는 두 종류의 양 우리가 있었다. 도시에서는 마을이 공동으로 양을 소유하여 양치기를 고용했다. 그들은 양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목자라기보다 숙련된 기술자들이었다. 반면, 산간벽촌의 양치기는 대부분 본인 소유의 양을 돌보았다. 양의 이름을 다 알고 있었고 각각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곳의 양 우리는 돌을 쌓아 담을 만들었고 문이 따로 없이 담 한 부분이 트여 있었다. 양치기는 밤이 되면 이 문을 자기 몸으로 가로 막고 자면서 양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했다. 선한 목자이며 양의 문이신 예수님은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친밀히 돌보며 살피실 것이다. 제 몸을 내어주시기까지 양들에게 생명을 주시며 풍성함과 구원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오늘 묵상은 주님께서 많이 사랑하셨던 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 대해 많이 알고 계셨습니다. 너무 많이 알고 계셔서 사랑하기 참 힘들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주님은 그들을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깊이 이해하셨습니다. 바로 그런 주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많은 위로와 소망이 되기도 합니다.
1. 너무나 슬퍼서 주님을 못 알아볼 때
요한복음 20장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일곱 귀신 들려있던 마리아를 주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교리적 지식으로 마리아를 조롱했지만, 예수님은 마리아를 사랑하셨고 고쳐주셨습니다. 마리아에게 ‘교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지식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녀도 주님의 죽음 앞에서 떨었으며, 너무 슬픈 나머지 부활하신 주님이 눈앞에 나타나셨지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그녀를 부르셨을 때, 그 음성을 깨달았을 때, 마리아는 ‘주님’이라고 외쳤습니다.
챔버스의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슬픔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릴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마주하고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혼란스러운 순간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이름을 부르시고, 과거의 놀라운 경험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러니 슬픔 가운데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단지 주님께서 다시 찾아와 우리를 부르실 때, 용기 있게 외치십시오. ‘주님!’이라고 말입니다.
2. 고집스러울 정도로 의심할 때
두 번째 위로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의심하던 제자 도마에게 찾아오신 주님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는 왜 주님을 의심했을까요? 모든 제자들이 있던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으나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체험했던 자리에 도마 홀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고집스럽게 말했는지 모릅니다.
요한복음 20장 25절 “…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
우리는 도마가 얼마나 고집스럽게 어깃장을 놓고 있는지 압니다. 이런 모습을 보는 다른 제자들 역시 많이 답답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비난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남들은 다 있었던 그 자리에 너는 왜 없었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도마를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특별한 관심과 손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순간에 도마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져봐야 믿겠다면, 네 손으로 직접 만져 보아라”라고 말입니다. 의심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기보다는 주님을 가장 확실하게 아는 통로로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도마에게 홀연히 찾아오신 주님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고집스러운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거나, 누군가의 완고함에 대하여 비난하지 마십시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대’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찾아오실 때 우리도 도마처럼 고백할 것입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말입니다.
3. 이기심 때문에 주님을 부인할 때
요한복음 21장 15-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죠. 부활하신 주님이 옛 생활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주님의 수제자로 불렸지만 예수님을 심판하던 법정 뜰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오늘 묵상에서 이기심, ‘selfish’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주님께서 고통당하시던 현장에서 자신의 고통만 모면하려고 주님을 부인했으니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입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그런 그에게 찾아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회복을 경험하며 베드로는 놀라운 고백을 하죠.
요한복음 21장 15절 “…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세 사람 모두에게 부끄러운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모두 개인적으로 만나 친밀함 가운데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부끄러운 과거로 인해 침체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개인적 친밀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챔버스가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사귐의 역사가 있습니까? 제자도의 한 가지 증표는 주님과의 친밀한 연결, 곧 그 어떤 것도 흔들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