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 12:5
한 줄 노트
- 성령께 자신을 맡기지 마십시오!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애써 외면하십시오! 그러면 곧 당신의 삶에서 성령이 소멸될 것입니다.
- 진정한 성화란 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입니다.
묵상질문
오늘도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당황스러운 일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묵상 레시피
(히브리서 12:4-13)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 성도들의 싸움은 언제까지 계속됩니까? (4절)
- 이 싸움은 누구의 권세 가운데 있습니까? (5,10절)
- 고통스런 훈련과 징계는 곧 무엇을 반증하는 것입니까? (6-8절)
- 훈련과 징계가 맺게 되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10-11절)
- 본문이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2-13절)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4절)
1세기 기독교인들은 신앙생활을 중도하차 할 위험에 놓여 있었다.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며 겪는 물질적, 사회적, 감정적 위협 및 관계의 갈등 등 여러 상황과 죄에 끊임없이 노출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에게는 아직 가야 할 여정이 남아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모범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고난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피 흘림과 십자가를 말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채찍질 하신다(6절)
5절과 6절은 잠언 3:11-12절을 인용한 구절이다. 히브리서는 고난으로 인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일깨운다. 그들이 받는 고난은 시작과 의도가 어찌되었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속해 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녀를 훈육하고 성장하는 기회로 선용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안에서는 어떤 것도 낭비되거나 불필요하지 않다.’ ‘육신의 아버지’는 잘못된 목적과 방법 혹은 무지 속에서 징계할 수 있다.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징계와 과정은 늘 옳고 바르다. 우리에게 반드시 유익과 선으로 돌아오며 그 결과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9-11절).
1. 성령을 소멸하는 방법
첫 번째 주제 제목을 역설적으로 달아 봤습니다. ‘성령을 소멸하는 방법’ 챔버스는 우리가 아주 쉽게 성령을 소멸시킨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징계를 무시하거나 주님께 꾸지람을 들을 때 낙심해버리면 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기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시험하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시험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죠. 챔버스는 우리가 ‘얕은 차원의 성화 경험’만을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에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얕은 차원의 성화란 우리가 ‘쉽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쉽게’ 터득한 얕은 지식이 아닐까요? 조금 배우고, 잠깐 기도하고,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는 신앙의 단계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화란 험한 파도와 깊은 죄의 유혹을 견디며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쉽게 ‘이것은 마귀의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외면하는 것들이 사실은 성령을 소멸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 성령님의 견책하심에 삶을 교정하게 됩니다.
폴 워셔의 책 [확신]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징계를 당하는 순간은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나중에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채찍질이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직접 주어지든 세상이나 마귀를 통해 간접적으로 주어지든, 그분의 계획과 지혜롭고 전능하신 뜻에 따라 주어지는 징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 백성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좁은 길을 열심히 걸어야 한다. 그분의 계명과 지혜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복되고 안전한 뜻 가운데 머물러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해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노력해야 한다.
폴 워셔는 징계 받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낙심하지 말아야할 이유에 대해, 그 열매는 하나님이 뜻하신 선한 열매이며 모든 것이 그분의 계획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비록 그 징계가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방식으로 세상이나 마귀를 통해 올지라도, 결국 그 길이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방법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을 때, 그곳이 어떤 곳인지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의 눈을 감거나 귀를 닫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바로 세우도록 맡겨드려야 합니다. 오늘의 한 줄 노트는 역설적으로 성령을 소멸하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2.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가 성령을 소멸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본문 히브리서 12장 5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성령께서 우리를 꾸짖으실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잘못했던 일들에 대하여 핑계대지도 말고, ‘어쩔 수 없었습니다’하고 변명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나 자신을 주님께 맡길 준비가 되어 있느냐 입니다. 첫 번째 주제에서 ‘얕은 차원의 성화 경험’에 의지하면 성령을 쉽게 소멸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성화’란 무엇인지 한 번 짚고 넘어가면 좋을 듯합니다.
챔버스는 ‘성화’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뭔가 해주시기를 원하는 ‘내 나름대로의 생각’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위해 무엇을 하실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이 부분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대부분의 기도가 그렇습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무언가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우리는 ‘많은 기도’로 ‘자신의 생각’을 성취해 나가는 사람을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 시간 기도를 하고 신앙의 연조가 쌓여도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는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고집스럽고 이기적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화’라는 이름으로 아무리 자신을 포장해도, 하나님의 이름과 생각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위선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성화는 ‘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때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와 같이 징계하실 때 그분의 방법으로 하시도록 순응하십시오. 그분으로 당신을 하나님께 올바르게 서도록 하십시오.”
[오스왈드 챔버스의 성령론]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성령을 받을 때 곧바로 나타나는 현상은 평화나 기쁨이 아니라 당황함과 놀라움이며, 우리는 안정감이 아니라 괴리감을 가지게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변하여 모든 것을 다르게 보며 다르게 대하기 때문이다. 전에 본 것들은 눈먼 상태에서 보았던 것들이다. 예를 들어, 성령을 받기 전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아주 분명하고 확실한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해 보이는 일들에 대하여도 평범하고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뭔가 확실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나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그 대가는 성령의 견책을 받아들이는 용기 있는 마음입니다. 어떠한 호된 꾸지람에도 낙심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민감하면, 주님께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를 성화의 단계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