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뜨거운 사막이 변해 못이 될 것이며
사 35:7
한 줄 노트
- 비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으시는 과정을 통해 ‘실재’가 됩니다.
묵상질문
고통이 찾아왔을 때, 바로 그 시간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비전을 만들어 가시는 시간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았습니까?
묵상 레시피
(창세기 37:1-11)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이사야 35:7)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 가족 안에서 요셉의 형편과 평가는 어떠했습니까? (1-4절)
- 요셉은 어떤 꿈을 꾸었으며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6-7절, 9절)
- 형제들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5,8,10-11절)
- 비전을 선포하는 요셉의 방식과 태도는 어떠합니까?
- 비전이 실재가 되기까지 요셉은 어떤 훈련을 받습니까?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3절)
요셉과 형제들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새번역으로 4절 말씀을 보면 형제들이 요셉에게 ‘말 한마디도 다정스럽게 하는 법이’ 없을 정도였다. 여러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야곱 가족의 구조적 문제, 아버지의 편애, 요셉의 행동과 태도 등을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야곱은 요셉에게 채색 옷을 지어 입혔다. 평복을 초월한 귀하고 좋은 옷, 왕족들의 옷으로 추정된다. 형제들은 이로써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후계자로 지목했으며 족장의 권한을 넘길 것이라고 해석했다. 채색 옷을 입었던 요셉은 노예의 옷, 집사의 옷, 죄수의 옷, 총리의 옷을 바꿔 입으며 비전에 맞는 사람이 되기까지 훈련 받는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더욱 미워하였더라(5절)
요셉 이야기의 특징은 신적인 현현이나 장소, 이적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철저히 평범한 현실 가운데, 평범한 방식으로 훈련하신다. 하나님은 꿈에서 직접 계시하지 않고 상황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늘 두 개의 꿈을 같이 주셔서 이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일임을 확신케 하신다(37:5-8, 9-11/ 40:9-13, 16-19/ 41:17-21,22-24).
요셉은 자신의 비전을 공유하는 태도와 방식으로 형제들과의 관계가 더 악화된다. 요셉은 자신의 위치와 상황, 상대방의 형편을 파악하고 행동하는 데 미숙하다.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는 사건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어 온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은 요셉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하도록 인도하신다. 보이신 비전이 실재가 되도록 오랜 시간과 과정 속에서 훈련시키신다.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이나 일방적인 선인은 없다.
비전이 실재가 되도록
오늘 묵상의 첫 문장입니다.
“어떤 일이 실재가 되기 전에 언제나 비전이 있습니다.”
늘 그랬듯이 오늘도 챔버스는 두 개의 단어를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래 원문 제목도 ‘Vision and reality’인데, 어떻게 비전이 실재가 될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비전은 실재보다 늘 앞서 있습니다. 그러니 비전이 실재가 되기까지는 일정한 과정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아직 비전이 실재가 되지 않은 시간에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 기간을 참지 못하고 유혹에 빠지면 비전은 결코 실재가 되지 못하고 추락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비전을 이루어 실재가 되게 할 수 있을까요? 챔버스는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해 꼭 통과해야하는 과정과 시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고 우리를 골짜기로 데리고 가셔서 그 비전에 맞게 빚기 시작하십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하나님이 빚으시는 사람]이라는 책에서 연단의 필요성에 대하여 말합니다. 연단의 시간은 마치 대장장이가 모루 위에서 망가진 도구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고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연단의 시간은 피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터널은 어둡지만 분명 산을 가로질러 갈 수 있다. 연단의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시종을 지켜보신다. 우리로 하여금 서른 살에 폭우를 만나게 하심으로 예순 살에 큰 태풍을 견뎌 낼 수 있게 이끄신다. 도구는 제 모양을 갖추고 있을 때만 유용하게 사용된다. 날이 무딘 도끼나 휘어진 나사돌리개는 손질이 필요하듯이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을 모루 위에 올려놓으신다면 감사하라. 당신이 아직은 고쳐서 쓸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일 테니까.
인생에서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는 참 힘듭니다. 위가 잘 보이지 않는 역경의 골짜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을 ‘인내’한다면 달라질 것입니다. 역경의 골짜기에서 인내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이유는 ‘조급함’ 때문입니다. 조급함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골짜기로 인도하셔서 우리를 그 비전에 합당하게 빚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불과 창수를 지나게 하실 것입니다.”
고난의 골짜기에서 불과 창수를 만날 때는 불필요한 요소들을 거두어 내는 시간입니다. ‘빚으신다’는 말을 곰곰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에게는 조각가가 칼을 들고 여기저기 떼어내는 모습이 상상됩니다. 빚으시는 과정은 떼어내는 아픔을 감내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무척 힘들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신뢰를 쌓아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문장입니다.
“비전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로 그 비전에 맞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 언제나 일해오셨습니다.”
그런데 비전이 실재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우리를 비전에 맞는 사람으로 빚어가기 원하시는데, 우리가 계속 그분의 손길을 피해 도망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도망간다기보다는 스스로의 비전에 맞게 자기의 형상을 빚어보려고 애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비전이 어떻게 우리에게 실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참다운 비전이란 무엇일까요?
(의역) “비전은 공중에 떠 있는 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당신이 바뀌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겨야 합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빚어 가시도록 ‘양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빚으셔야만 하나님의 비전에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비전이 아직 실재가 되지 않았을 때, 사탄은 우리를 계속 유혹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유혹에 빠지는 순간 비전은 실재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김경진 목사는 [완벽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라는 책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성령의 임재를 광야에서 맞이하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에 새겨 주시고는, 우리를 곧장 광야로 이끄실 때가 있습니다. …
예수님께도 성령은 그렇게 역사하셨습니다. 40일간 금식하는 자리에 나아가게 하셨고, 생존의 위협을 받는 자리까지 몰아가셨습니다. 모든 힘이 빠지며 극도의 고통을 경험하는 자리로 인도하셨습니다. 깊은 슬픔의 자리에 들어서게 하셨으며,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비극을 경험하게 하셨고, 영혼의 갈증으로 심히 목마르게 하셨습니다. …
광야에 선 우리는 배고프고, 지쳐 있으며, 힘이 다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 광야의 자리에서 성령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 고통의 자리에서 우리는 고민합니다. ‘떡으로 살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인가? 권력을 얻기 위해, 유명해지기 위해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 것인가? 어떻게 나의 믿음을 고백하며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광야에서 결단을 하게 됩니다. 그곳에 성령이 계십니다.
챔버스는 이 과정에서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왜 용기가 필요할까요?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용기는 의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적으로 신뢰할 때 하나님께 우리를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단계까지 가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비전이 실재가 될 때까지 안일함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비전이 실재가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