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 14:26
한 줄 노트
-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묵상질문
당신은 어디에 헌신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신조 혹은 교리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묵상 레시피
(마태복음 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누가복음 14:26)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 헌신의 모습처럼 ‘보이는’ 행동들은 무엇입니까? (21-22절)
- 이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23절)
-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21절)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21절)
우선은 거짓 선지자를 의미한다. 더 나아가 종교적인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입술로 ‘주’를 부르며 기도의 ‘행위’는 하지만 행동의 열매가 없음을 지적하신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버지의 뜻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 날에(22절)
‘그 날에’는 미래에 주어질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묵시 문학적 표현이다. ‘진정한 헌신’과 헌신처럼 ‘보이는’ 행동들은 때로 구분이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가식과 위선의 종교 행태들이 드러날 날이 올 것이다. 그들의 설교와 능력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드러날 것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23절)
‘도무지-못하니(헬, 우데포테)’는 ‘일찍이 한 번도 그러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단 한 번도 알았던 적이 없다’고 가리키는 이는 이방인이 아니다.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하나님 일꾼으로 여겨지던 자일 수도 있다.
제자의 도에 대하여
오늘 본문 말씀은 누가복음 13장부터 시작되는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챔버스는 제자도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합니다.
“제자도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개인적이고 열정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헌신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근거하면 우리 삶에서 때때로 가장 가까운 관계, 즉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그리스도의 요청이 충돌할 때에도 주저함 없이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또한 주님의 인격에 헌신하는 것은 어떤 ‘원칙’(principles)이나 ‘요소’(cause)에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원칙과 요소의 의미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데, 어떤 교리나 원리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교회의 교단과 교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교단의 교리를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나 주님께 헌신하는가 보다, 얼마나 교단의 교리에 충성하는지를 따지니 말입니다.
오래전 어떤 미국 대형 침례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날 설교에서 목사님이 아주 인상적인 말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 간판에는 ‘침례교’라는 말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침례교인이 되는 것보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교회를 다니고,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인격에만 헌신되고, 그분께 ‘사랑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따른다고 해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단지 우리의 열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주를 향한 열정적인 사랑을 부어주지 않으시면 이 땅의 그 누구도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챔버스는 계속해서 우리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 의지는 왜곡될 수 있습니다. 아니,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의지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원한다면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감각과 모든 성품을 다 휘어잡아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뜨거운 헌신을 하게 하십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차고에 있다고 해서 우리가 자동차가 되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사랑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성령께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도록 만들기 전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인, 또는 제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묵상에서 챔버스가 사용하고 있는 말 중에 어렵지만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자발적인 순종의 독특함”이라는 말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입니다. 제자의 삶은 자발적으로 순종할 뿐만 아니라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순종합니다. 이 말은 어떤 교리에 얽매여 순종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또 챔버스는 예수님에 대하여 “일관성이 없는 모순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일관성 없이 사람들을 대하셨습니다. 오히려 일관성 있게 율법을 적용하려는 사람들을 질책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무시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율법을 적용하셨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넘어서는 무엇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준은 늘 일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마음이 있었고,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당신도 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신조나 율례보다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 일관되어야 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하나님의 사랑]에 보면, 제자의 도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따를 때 가장 중요한 자세는 자신의 방법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만일 내 주장을 하며 주도권을 잡으면 이는 누군가를 더 이상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가 어떤 주도권을 취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우리가 주도권을 취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할 일을 택하거나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알 필요가 없으며 그냥 따라가면 된다.
제자인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우리의 방법을 주장하거나 주도권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그저 따라가야 합니다. 오래전에 보았던 마이클 야코넬리의 [영성]이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전혀 일관성이 없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뒤죽박죽이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일관성’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 일관성이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여지없이 깨질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순종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교리나 원리, 신조가 자꾸 하나님의 마음을 가로막는다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정한 헌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그 모든 것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