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해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요 12:27-29
한 줄 노트
-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고통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 우리의 슬픔과 고통이 누군가를 위한 유익으로 바뀌는 것은 축복입니다.
묵상질문
지금 당신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묵상 레시피
(요한복음 12:27-28)
27 지금 내 4)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히브리서 5:7-8)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예수님의 심경은 어떠하셨습니까? (27절)
- 예수님은 그 마음 그대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27절)
- 슬픔과 고통 중에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28절)
- 하늘로부터 임한 소리는 무엇입니까? (29절)
- 히브리서 5:7-8을 묵상해 보십시오.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17절)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올 때에 이스라엘은 구원하고 이방인들은 심판할 것이라는 그릇된 편견에 사로 잡혀있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 만일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할 목적이었다면 이방인 뿐 아니라 이스라엘까지 단 한 사람도 형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롬3:23).
내 마음이 괴로우니(27절)
‘괴롭다(헬, 타랏소)’는 흔들리다. 불안하다. 혼란하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모든 일에 우리와 동일한 고통을 경험하셨다. 슬픔과 고통에 수반된 모든 감정을 경험하셨다. 예수님은 복잡한 심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나아간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27절)
‘아버지여, 이때로부터 나를 구원하여 주시겠습니까?’로 번역되기도 한다. 예수님의 깊은 고뇌를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음을 고백한다. ‘이를 위하여(헬, 디아 투토)’는 목적을 지시한다. 예수님은 슬픔과 고통 속에 길을 잃지 않으시고, 있어야 할 자리와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아셨다. ‘이 때에(헬, 에이스 텐 호란 타우텐)’는 사람이 임의로 만들어가 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 안에 포함되어 있는 시간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28절)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과 관련되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셨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셨다. 예수님의 활동은 언제든지 아버지의 이름에 근거되었고,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요10:24, 막11:19).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28절)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행한 예수님의 모든 일들을 인정하셨다.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하나님은 십자가 고난을 앞둔 예수님께 힘과 확신을 주신다.
1. 슬픔 인정하기
지난 이틀 동안 우리는 죄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하여 묵상했습니다. 오늘은 죄가 가져오는 슬픔과 고통의 문제를 다룰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묵상의 제목처럼 ‘슬픔’이 우리에게 진정한 자아를 선물한다는 사실을 함께 볼 것입니다. 이런 의문이 듭니다. 죄가 슬픔을 낳고, 슬픔이 이런 유익을 가져다준다고 하면, 결과적으로 죄가 선한 것이 아닙니까?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도 선용하신다!’ 이것이 악이 선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어떤 상황을 통해서든 선한 결과를 이끌어내시지만, 그 상황이 반드시 좋다고 생각하거나 죄를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슬픔과 어려움에 대한 성도의 태도는 고난들을 막아달라고 구할 것이 아니라 매번 슬픔의 불을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아’를 보존하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고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은 ‘고통으로부터’ 구함 받은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서’ 구원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그 고통에서 내려와 사명을 감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역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로 슬픔과 고통을 대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슬픔은 엄연히 존재하며 피해갈 수 없습니다. 항상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죄와 슬픔과 고난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단지 실수로 우리에게 이런 일들을 허락하셨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과 슬픔이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고통을 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2. 슬픔이 주는 유익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슬픔의 이중성입니다. 슬픔이 사람들을 항상 훌륭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슬픔을 통해 천박한 것들을 태워버리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파괴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공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지만, 성공으로 인해 이성을 잃기도 합니다. 또한 어떤 역경과 슬픔을 경험하지 않는 인생은 지루하다고 불평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는 슬픔의 불 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과 인간의 경험은 그것이 사실임을 알려줍니다.”
슬픔의 불을 지나지 않은 사람은 어려움을 당한 이들을 이해하지 못해 멸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 가운데 자신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이 고통의 시간을 지났기 때문에 누군가 고통 속에서 도움을 요청한다면 기꺼이 시간을 내어 도울 것입니다. 슬픔이 주는 유익은 이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슬픔의 불을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한 영양분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자신의 아픔을 이겨내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유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좋습니다. 미국의 흑인노예해방에 큰 자극제가 된 책 있습니다. 유명한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1852년 발표된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의 작품입니다. 나무위키라는 열린 지식 공유 사이트에서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노예 제도에 대한 비판 정신을 강하게 담고 있는 소설로서, 노예 제도의 비참한 현실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여 미국 전체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이 남북전쟁을 일으켰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올 정도로 파장이 컸다. 물론 이 소설 한 편이 남북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은 좀 과장이지만, 이미 곪을 대로 곪은 남과 북의 갈등이 터지는데 있어서 노예 제도에 대한 여론을 크게 환기시켜서 당시까지 자유주와 노예주가 분리된 어중간한 상황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것은 확실하다.
스토 부인은 책에서 흑인 노예인 부모와 자식이 서로 다른 곳으로 팔려가면서 애통하는 광경을 잘 묘사하여 당시 미국 사람들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그로인해 미국 사람들이 흑인 노예가 해방되어야 한다고 각성하게 되었고 아브라함 링컨이 이를 단행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저자인 스토 부인은 결혼 후 귀여운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죠. 그 슬픔 가운데 스토 부인은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딸이 죽어서 이별하는 것도 이렇게 슬픈데, 흑인 노예들은 살아서 부모 자식 간에, 형제간에 생이별하고 있으니 그 슬픔이 얼마나 클까 생각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그 유명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쓰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은 무엇일까요? 누군가에게 유익이 되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보면 슬픔의 불을 지나가는 것은 우리 인생의 큰 축복입니다.
오늘 묵상 본문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해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요 12:27-29)
안젤라 애쉬윈(Angela Ashwin)의 시가 참 좋습니다. 함께 나누며 묵상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그들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이 실수하지 않게 보호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
그들이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의 삶이 편안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삶의 도전들에 용감하게 대처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이 연약할 때 함께 해주시고
늘 해를 당하지 않게 지켜주시고
항상 주님의 사랑 안에 보호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