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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최고봉

하나님 아니면 죄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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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사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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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노트

  • 우리는 죄의 실체 앞에서 ‘하나님 아니면 죄 죽이기’라는 사실을 직면합니다.

묵상질문

당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죄의 실체’를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습니까? 그 죄의 목록을 적어봅시다.


묵상 레시피

◆디모데전서 1:12-17 + 이사야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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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1:12-17)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사야 53:3)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 바울이 부름 받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12,14절)
  • 바울은 본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3,15절)
  • 하나님은 왜 바울에게 긍휼을 입게 하셨습니까? (16절)
  • 주를 믿는 자들이 얻을 것은 무엇입니까? (16절)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12절)
바울은 충성된 자가 아니었다.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13절). 죄인 중의 괴수였다(14절).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의 됨됨이나 공로에 의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그를 부르셨다. ‘자격이 있어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시면서 ‘자격 있게 여기신 것’이다. 바울은 ‘직분’이란 단어에 보통 사용하던 ‘사도직(헬,아포스톨레)’이란 용어 대신 ‘봉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아’를 사용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봉사’하고 ‘섬기는 일’을 위해 부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직무 능력’이 아니라 ‘섬기는 능력’이 관건이다.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2-13절)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 세 쌍의 죄악은 긍휼, 믿음, 사랑, 세 쌍의 말로 상쇄된다. 바울은 불신앙의(헬, 아피스티아)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분에 대한 사랑을 주셨다(고전13:13, 엡1:15, 살전1:3, 3:6, 살후1:3).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15절)
여기에 쓰인 헬라어 프로토스는 ‘가장 현저한’, ‘가장 눈에 띄는’이란 표현으로 ‘가장 악한 죄인’이 아니라 ‘가장 두드러진 죄인’이란 의미다. ‘가장 악한 자’라기보다 ‘가장 큰 악행’을 행했다는 의미다. 즉 교회와 그리스도를 핍박한 일이다(갈1:13). 이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평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핍박하는 가장 큰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 중의 괴수에게 과분한 긍휼과 은혜를 허락하셨다.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16절)
목회서신에서 생명(헬, 조에)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사는 풍성한 삶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란의 행위에서 내려온 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관계(딤후1:1) 가운데, 성령의 역사(딛 3:6)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특성의 삶이다. 이는 경건을 추구하는(딤전4:8) 성도들의(딛1:2) 확실한 소망이다.


◆ 묵상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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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실체

오늘부터 3일 동안 우리는 ‘슬픔과 죄’에 관한 짧은 시리즈를 함께 묵상할 것입니다. 이 시리즈는 챔버스 목사가 1917년 6월 10일 이집트의 치열한 전쟁터에 있던 군인들에게 전한 ‘고통과 슬픔’에 관한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전쟁터의 군인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고통과 슬픔’의 존재가 아닐까요? 혹시 지금 슬픔을 느끼고 있나요? 그렇다면 그 슬픔의 근원은 무엇인가요?


오늘 묵상은 죄의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단지 죄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논리적인 차원에서도 죄의 실체를 인정해야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 되고 또한 우리 삶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도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죄의 실체를 인정할 때, 우리는 ‘슬픔’에 직면하게 됩니다. 오늘 원문 제목이 “슬픔의 인식” (acquaintance with grief)인 이유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처음부터 죄의 실체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성과 본능으로 충분히 죄를 통제하고 교육해서 하나님처럼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이런 생각은 환상에 불과했습니다. ‘죄’가 우리의 이런 모든 계산을 뒤집어 놓은 것이죠. 혹시 오늘 묵상을 하면서 ‘죄는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제가 너무 비관적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인간이 참 악한 존재라는 생각을 합니다. 무엇보다도 ‘죄의 경향성’을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젖 먹던 시절의 죄를 회개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이 시절부터, 소년 시절 친구들과 함께 무리지어 죄를 지은 모습까지 회개합니다. 어거스틴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도 죄의 경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악을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에서 선한 영역이 줄어들 때마다 악한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떻게 우리 인간이 백 퍼센트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그러니 우리 안에 있는 죄성, 혹은 죄의 경향성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주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손봉호 교수의 책 [나는 누구인가]에 보면, 죄의 실체와 그리스도의 필요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사회의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우습게 본 현대인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큰 문제에 봉착해 있고, 그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태도, 즉 죄의 결과임을 인정해야 한다면 현대인도 그 죄를 용서받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길을 제시하셨고, 그 길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곧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 이상 현대인에게도 예수는 누구 못지않게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과학적 사고에 지배당한 현대인들은 이런 신화 같은 이야기를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겠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 현대인의 그 교만이 바로 죄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며, 바로 그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생기고 현대문명이 비관적으로 흘러간다면 현대인은 누구보다도 더 예수를 필요로 한다고 할 것이다.


죄란 무엇일까요?

“죄는 엄연한 사실이지 어떤 결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죄는 실제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란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과 죄,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어떤 ‘결함’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결함은 채우면 됩니다. 하지만 죄는 약간의 문제를 보완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죄는 아주 실제적으로 역사합니다. 죄가 우리를 다스릴 때,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죽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 우리를 다스리기 시작할 때는 죄가 죽게 됩니다.

로마서 8장 1-2절 말씀.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범한 순간,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눈을 피해 도망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눈에 띄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스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다스림과 죄 사이의 중간 지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떠났다면, 그것은 곧 죄의 영향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죄의 정점’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행하셨던 역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역사적 사실이 될 것입니다. 죄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 오신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이사야 53장 3절을 보십시오.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주님이 이 땅에서 고통과 슬픔을 겪으신 이유가 바로 ‘죄’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통과 슬픔을 우리가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고통을 당하고, 견디고, 이겨나가지만 결코 친숙해 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묵상에서 죄의 문제를 다 다루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죄는 실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해야합니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 되고, 또한 우리 삶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도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다면 죄의 실체를 인정하는 일은 절망일 것입니다. 하지만 죄를 이기신 십자가의 능력을 믿을 때, 우리는 기꺼이 죄를 이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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