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 7:2
한 줄 노트
-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한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똑같이 비판받을 것입니다.
묵상질문
지금 당신이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비판의 내용을 적어 볼까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나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해 볼까요?
묵상 레시피
(로마서 2:1-11)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마태복음 7:2)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범하는 오류는 무엇입니까? (1절)
- 남을 판단하는 자도 실상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까? (3절)
-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으시고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절)
- 우리는 그 인내와 참으심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4-5절)
- 우리가 판단하고 살펴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6-10절)
-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1절)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1절)
본문에서 말하는 ‘판단’은 ‘정죄를 위한 심판’이다. 재판 장면을 떠올려 보라. 심판관은 심판 받는 사람이 처벌받게 될 경우 세밀하고, 논리적이며, 합당한 잣대들을 근거로 제시한다. 심판관도 법정에 서게 될 경우 동일한 기준에 의해 판단 받을 것이다. ‘변명의 여지‘는 없다. 하나님은 같은 악행에 대해서 늘 진리대로(편파적이지 않고 공정하게) 하실 것이다(2,6,11절).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4절)
유대인들은 선민으로서의 지위를 오해한다. 면책 특권이나 하나님이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으시리라 기대한다. 하나님은 인자함과 선함, 용납하심과 오래 참으심으로 유대인들이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엉뚱하게도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고 여긴다. 유대인들은 현실에서 벌 받지 않는 것은 곧 장차 상 받을 일만 있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참고 계신다고 말한다. 하늘 상급이 아니라 진노가 쌓이고 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5절).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5절)
그들의 무지와 경솔함은 반드시 마음의 완고함을 가져온다. ‘고집’과 ‘완고함’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과 관련되며 ‘강팍함’으로 번역된다(신9:27, 31:27). 하나님의 참으심은 무한하지 않다.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심판을 향한다. 회개에도 때가 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6절).
하나님이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11절)
원문을 직역하면 ‘하나님이 얼굴을 들어주지 않으므로’이다. 고대 근동에는 높은 사람을 찾을 때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시했다. 이 때 높은 사람은 예를 표한 사람의 얼굴을 들게 하여 수용과 환영을 표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얼굴을 들어주다’는 말은 편애를 보인다는 의미가 있다. 즉, 하나님은 유대인들이라고 편애하거나 특혜를 주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영원한 법칙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한 법칙’입니다. 챔버스는 이것을 ‘빗나가지 않는 시험’(The undeviating test)이라고 말합니다. 챔버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결코 빗나가지 않는 법칙을 가지고 계시는데, 각 사람이 남에게 베푼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 것과 같이 우리도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일종의 ‘시험’(test)과 같습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시험’(test)이 됩니다. 이 시험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오늘 묵상에서 챔버스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 ‘보복’(retaliation)과 ‘보상’(retribution)은 무엇이 다를까요? retaliation과 retribution의 차이는 ‘어떤 행동의 대가’가 복수(revenge)에 의한 것이냐 정의(justice)에 의한 것이냐에 있습니다. retaliation이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보복의 행위라면, retribution은 신적인 권위에 의해 수행되는 정의의 행위로서의 응징 혹은 보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말씀은 retaliation이 아닌 retribution의 차원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상’을 삶의 중요한 원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것은 ‘보복’과는 다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의 결점을 찾아 험담했다면, 우리도 똑같이 누군가에게 그대로 흠 잡힐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 우리 자신도 이미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위선과 속임수와 거짓을 보는 이유는 바로 우리 마음속에도 똑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챔버스가 여러 번 반복해서 이야기 합니다. 누군가를 비판하지 않게 하는 성품은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과 죄악이 이미 다 드러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우리는 한 없이 겸손해 집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비판할 권한이 없다는 사실 또한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살아가는 성도들의 공동생활에서 ‘겸손’과 ‘비판’은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겸손한 공동체에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드러나고, 비판이 난무한 공동체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를 비판하는 혀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 혀로 인해 똑같은 심판을 우리 자신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3장 8-10절 말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본회퍼 목사님의 [성도의 공동생활]에서도 ‘비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처음부터 혀를 훈련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비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타인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판단하며 정죄하는 일을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또한, 타인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자리에 두고, 그런 식으로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께서 형제를 자기 앞에 두신 그 모습 그대로, 형제가 완전히 자유롭게 서도록 놓아줄 수 있습니다. 또한, 그의 시야가 넓어져서 처음으로 형제들에 대해 경탄하게 될 것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의 부유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다스리는 원리는 자기 정당화에서 나오는 폭력 행사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칭의에 기초한 섬김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단 한번이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 후로는 오직 섬기려고만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라면,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 제가 동료들을 판단한 대로 저를 판단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고 하셨는데, 우리가 지금까지 동료들을 죄인으로 판단해 왔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역시 죄인이라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판단하시면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고 구원에 대해 아무 준비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임합니다. 아주 흥미로운 예화인데,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구원의 은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복음 전도자가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설교를 하자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당신의 설교는 마치 범죄자들에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설교는 감옥에서나 해야 어울릴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 설교자는 “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만약 감옥에서 설교한다면 그 본문으로 해서는 안 되지요. 거기서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딤전 1:15)라는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판단하시기에 감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