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따라오라
막 1:17
한 줄 노트
- 하나님의 관심은 오로지 ‘권리 포기’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재능이나 기질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 성도의 삶이란 모든 주권을 주님께 양도한 삶이며, 이를 통해 계속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묵상질문
오늘 당신이 하나님께 ‘주권을 양도’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묵상 레시피
(요한복음 4:28-42)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마가복음 1:17)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무엇으로 고백합니까? (29절)
-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합니까? (28-29, 9절)
-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인의 증언을 들은 후 누구에게 나옵니까? (40-41절)
- 그들이 세상의 구주를 알고 믿게 된 것은 무엇으로 인함입니까? (42절)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의 양식’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34절)
- 제자들이 해야 하는 수고는 무엇입니까? (38절)
- 씨앗을 심고 거둘 수 있도록 일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35-38절)
- 부르심과 응답, 확신과 증거의 모든 과정은 누구의 주권에 있습니까?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31절)
본문에는 세 가지 상황이 펼쳐진다.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고 증거 하러 가는 사마리아 여인, 예수님께 먹을 것을 권하는 제자들, 사마리아 여인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께 오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 세 가지 상황 모두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하고 있다. 여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사람들에게 전한다. 사마리아인들은 여인이 ‘오라’는 말에 예수께로 ‘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구주로 인정한 것은 예수 앞에 나와 말씀을 들었을 때이다(42절).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37절)
사마리아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러 오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추수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씨앗을 심고 이끄시며 예수님으로 하여금 거두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6:37,44,65).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듯이 예수님 역시 제자들을 보내신다. 모든 일과 과정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셨듯이, 제자들에게 맡기신 모든 일 가운데서도 주님이 주권적으로 일하실 것이다. 제자의 일은 하나님이 이미 가꾸신 곡식을 추수하는 일이다(38절). 전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관심
오늘 말씀 역시 ‘내게로 오라’라는 주님의 명령을 나눕니다. 3일에 걸쳐서 동일하게 “Getting there”이라는 제목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도달해야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 인간의 ‘기질’과 자신의 ‘애착’이 그리스도께 나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의 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가진 재능이나 애착에 있지 않습니다. 종종 ‘우리의 재능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실 이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삶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바친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본래 그분의 것을 돌려드리는 일이니 말입니다. 이 부분을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비유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거나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는 것이 어떤 일과 비슷한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가서 “아빠, 아빠 생일 선물 사게 6펜스만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돈을 줄 것이고, 그 돈으로 사 올 아이의 선물을 기쁘게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착하고 바른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이 거래를 통해 6펜스의 이익을 얻었다고 생각할 바보는 없습니다.
C. S. 루이스는 기독교의 구원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일종의 시험이나 거래로 생각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이 과정에서 성도는 자기를 주장하는 권리를 포기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돈으로 아버지에게 드릴 선물을 사는 아이의 비유가 흥미롭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의 재능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유일한 단 한 가지는 자신에 대한 권리입니다.”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권리를 양도하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거룩한 실험”(holy experiment)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양도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사용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실험은 실패한 적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 관원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본회퍼와 함께하는 하루]라는 책에서, 이 청년이 주님 앞에 권리를 포기하지 못한 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관한 본회퍼 목사님의 통찰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권리와 재산과 명예를 포기하는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고집하여 하나님의 권리를 쉽게 침해하는 사람보다 이 모든 선물의 참된 근원이신 하나님을 더 높이 경외할 것입니다. 한 부자 청년에게 권리 중 하나를 내려놓으라고 예수님이 요구하신 일은. 그 청년이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지킨 것이 하나님께 순종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무시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2. 성도의 특징
‘성도’란 무엇일까요? 그는 오로지 그리스도께 자신을 철저하게 양도함으로써 흘러나오는 도덕적 본성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성도의 삶에는 언제나 이 놀라운 샘물이 흐릅니다. 하나님께 양도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언제나 새롭게 됩니다. 이때 성도는 모든 환경을 주도해 나가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요? 우리의 모든 환경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확신할 때 ‘불평’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불평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직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양도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당신의 체험으로부터 어떤 원칙도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천이 되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만이 원천이 되게 하십시오.”
지난 며칠 동안 했던 묵상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체험 위에 믿음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았습니다. 체험은 단지 더 나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동기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체험 위에서 더 큰 일을 계속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와 동일한 방식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신앙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려고 하고, 내가 경험한 것을 원칙으로 삼아 하나님을 왜곡하는 신앙적 오류를 범합니다.
지난 3일 동안 우리가 함께한 묵상의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이요, 성도의 삶입니다. 챔버스는 이러한 삶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그리스도의 ‘오라’는 메아리를 계속 만들어가는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아가는 영혼들에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런 물음만이 존재합니다. 당신은 예수님께 나아갔습니까? 아니, 지금 나아가고 있습니까?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여러분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샘솟듯이 솟아나는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라때는 말이야? 이런
체험으로 얻은 나의 원칙으로 부터 벗어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용에 온전히 나를 맏기고 하나님께 양도된 삶을
살아가는 믿음 갖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