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시 25:14
한 줄 노트
- 일상적인 일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됩니다.
- 하나님과 친밀한 순간에 경험하는 ‘막으심’은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하다는 증거입니다.
묵상질문
‘주님의 뜻입니까?’라고 확신 없이 묻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자꾸 묻지 말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길로 가십시오.
묵상 레시피
(사무엘하 7:1-17)
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3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4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7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1)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7 나단이 이 모든 말씀들과 이 모든 계시대로 다윗에게 말하니라
(시편 25:14)
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 다윗은 왜 하나님의 전을 짓고자 했습니까? (1-2절)
-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5-6절)
-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3,14-15절)
- 하나님이 다윗을 막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5-7절)
-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무엇입니까? (8-16절)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2절)
‘나는 돌집에 사는데 야웨는 천막 혹은 천막 휘장 가운데 거한다’는 뜻이다. 다윗은 자신이 안정된 위치에 ‘고정’된 것에 반해 야웨의 집은 여전히 광야에서 옮겨 다니던 성막 전통 가운데 있는 것에 마음이 쓰인 것이다. 나단은 다윗의 선의에 대해 인간적인 즉답을 내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웨께서 이르시되(코 아마르 야웨)’라는 공식 문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직접 나단에게 전달하게 하신다.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6절)
‘다니다’에는 ‘걷다’라는 동적 동사가 사용된다. 하나님은 정적인 분이 아니라 행동하시는 분이다. 집에 갇히거나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움직이고 인도하시는 역동적인 분이시다. 동일 본문인 역대상 28:2에는 성전을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안할 성전’이라고 표현했다. 즉 성전은 ‘하나님’이 평안히 거하시는 곳이 아니라 ‘언약궤’가 평안히 거하는 곳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뜻을 막으셨지만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특별한 관계를 누리게 하신다(14-15절).
1. 주님과의 사귐
챔버스가 가장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는 것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친밀함의 표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묵상도 시작이 쉽지 않습니다. 곰곰이 챔버스의 이 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슬픔을 고백할지 모르나 진정한 친밀함은 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기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여러 가지 기도제목을 아룁니다. 대부분 우리의 아픔과 슬픔, 혹은 필요 같은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무언가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합니다. 정작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듣지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기쁨을 누리시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처음 신앙생활 하던 때를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기도제목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과의 교제보다는 우리의 일방적인 기도로 많은 시간을 채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사귐은 우리를 아주 중요한 영적 세계로 인도합니다. 주님과 친밀할 때 주님은 우리를 그분의 목적을 향해 이끄십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기도의 본질에 접근합니다. 우리 안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때, 아주 세밀하고 구체적인 사건들 속에서 주님과의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들어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거대한 계획만을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에도 함께 하시는 분임을 고백하는 순간입니다.
2. 나를 인도하소서
묵상에 인용된 시편 25편 12절을 보면 시인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께서 정하신 길로 나를 가르치소서.”(시 25:12)
주님과의 사귐에 들어간 사람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자기의 소원을 말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정하신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곧 기쁨임을 고백합니다. 이런 기도가 지속되면서 그는 ‘풍성함’을 경험합니다. 챔버스는 이러한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우리는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다른 뜻을 선택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런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른 어떤 기도보다도 ‘주님 나를 인도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크고 충만한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한 번의 ‘구원 체험’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체험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책에 보면 로렌스 형제를 기억하는 사람이 그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말하기를,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대화하고 또 실행하는 모든 일에서 그분께 의뢰하는 습관을 형성하려면, 우선은 우리가 부지런히 그분께 여쭈어야 하겠지만, 그 다음으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분의 사랑이 내면적으로 우리를 일깨우는지를 신중히 살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즐거운 날들을 보낸 이후에는 수고와 고통의 차례가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그는 염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고, 또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그것들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뜻을 묻는 습관의 다음 단계는 사랑에 의해 일깨워지는 단계라고 로렌스 형제는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즐거움과 고난을 모두 주실 것을 알았고, 모든 것이 사랑의 뜻 안에 있음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도 기꺼이 나아갈 수 있을 만큼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우리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선택하려 할 경우는 주님께서 막으실 것입니다.”
‘막으심’을 경험하는 것이 왜 축복일까요?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서 있지 않은 사람들은 ‘막으심’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고 해서, 우리가 기도하거나 행동하는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늘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실수를 알아채는 영적 민감성입니다. 여기서도 챔버스는 아주 확고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의심이 생긴다면 당장 그 결정을 멈추십시오. ‘왜 안 되는 거지?’라고 하며 절대로 자신을 합리화하지 마십시오.”
‘정말 주님의 뜻입니까?’라고 반복해서 묻는 것은 진정 주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믿음이 아님을 우리는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 이런 질문을 하고 있다면, 성령을 거스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장한 불신앙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자식들도 다 성인이 되이 제 갈길로 나 가고 있고
맘 졸이며 지냈던 날들이 갑자기 끝이 나 버린 것 같아 . . . 바쁘게 지내왔던 삶이 허탈해 집니다.
다시 세상을 위해 일울 해야 겠다는 생각에
이것 저것 일 거리를 찾고 있는데 . .
오늘 말씀 ㅡ 주님의 길로 인도하소서
가슴에 깊이 새기고 성령님이 저의 길에 동행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