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시 25:12
한 줄 노트
-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 근심을 차단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하나님께 완전히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묵상질문
당신의 평안을 앗아가는 것은 무엇인가요? 기도의 골방에서 그것을 차단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묵상 레시피
(사무엘상1:1-18)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3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7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8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
한나와 엘리
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13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14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15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17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18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시편 25:12)
1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 한나에게는 어떤 슬픔이 있었습니까? (2,6절)
- 예배의 자리에서 한나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3-5, 7-9절)
- 한나는 그 마음을 안고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10-11절)
- 한나의 기도는 어떤 오해를 살만큼 간절했습니까? (12-14절)
- 엘리는 한나에게 어떻게 축복합니까? (17절)
- 하나님께 기도하고 축복받은 한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18절)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5절)
‘갑절’에 쓰인 히브리어 단어는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한 몫, 큰 몫 또는 갑절 등으로 해석된다. 브닌나와 그의 자녀들은 사람 수대로 ‘제물의 분깃’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는 자녀가 없었으므로 오직 한나 본인의 것, ‘한 몫’만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매우 ‘좋은’, ‘특별한 부분’으로 ‘한 몫’을 주었다. 그럼에도 한나는 예배하러 올라갈 때마다 ‘한 몫’을 받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로 늘 괴로웠을 것이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10절)
‘괴롭다’는 문자 그대로 ‘영혼의 쓰라림’이란 뜻이 있다. 한나의 전 존재가 비통하며 고통 속에 있다는 말이다. 한나는 스스로를 ‘마음이 슬픈 여자(히, 잇솨 케세트 루아흐)’라고 칭하는데 ‘고단한 영혼의 여자’, ‘험한 세월의 여자’라는 의미다. 한나는 ‘여종의 고통을 돌보아’달라고 기도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고통을 돌아보셨다’에 쓰인 표현과 동일하다(출3:7).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12절)
이 히브리어 표현은 ‘몰아경’에 있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인다. 한나는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 만큼 기도에 몰두하고 있다. 하나님께 온전히 몰입하고 있다.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18절)
‘한나’는 히브리어로 ‘은혜(히, 헨)를 받은 자’라는 이름 뜻을 가지고 있다. 한나는 하나님께 집중하여 기도했고, 믿었으며, 이로써 그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1. 하나님 생각하기
오늘 제목이 묵상의 주제를 아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이 말은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중심이 되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른 채 살아가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이기심이나 자신의 지식이 아닌 하나님께 사로잡혀야 한다고 말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 잡혀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기들은 엄마를 의도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데도 아기의 의식 속에는 언제나 엄마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갓난아이의 뿌리 깊은 의식에는 엄마가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닥치면 저절로 엄마를 찾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순히 ‘생각하는 것’과 ‘사로잡히는 것’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챔버스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는 굳이 생각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나님으로 귀결 됩니다. 가장 강력한 ‘생각’은 무의식의 상태에서 ‘생각’나는 것이 아닐까요?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를 생각하려고 의도하지 않아도 엄마만 계속 생각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것을 ‘관점’(perspective)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어떤 필요한 순간에 하나님을 떠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하나님으로 인해 생각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하나님과 연관해 생각하는 그런 상태를 의미합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의 책 [하나님을 들으라]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구한다는 건 일상을 매개로 하여 그분을 보려는 의지적인 노력이다. 우리의 모든 경험 속에서 늘 생각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그분의 계시의 방편들을 통해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흔히 재채기와 사랑, 이 두 가지는 절대 숨길 수 없다고 합니다. 특히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마음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다 티가 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죠.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무의식’은 인간 정신의 가장 크고 깊은 심층에 잠재하면서 의식적 사고와 행동을 전적으로 통제하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도 있듯, 우리 눈에 드러나는 의식적인 행동 아래에 수십, 수백 배에 달하는 ‘무의식’이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의 행동에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가 무엇에 사로잡혀있는가 또한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이는 바로 우리 속에 깊게 자리잡은 하나님을 향한 의식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져야할 중요한 신앙적 도전입니다. 우리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 의식’으로 인해 삶의 모든 순간에 자연스러움이 드러나고 있는지 말입니다.
2. 염려하지 않기
그렇다면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태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챔버스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어떻게 감히 주님을 불신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사로잡히면, 우리 안에 염려나 환난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주님께서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기가 ‘엄마’를 생각하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다면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염려가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악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김남준 목사님의 책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라]에 보면, 근심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의 골방 문이 열려 있어 세상일에 대한 근심과 유혹과 쾌락,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함께 들어와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홀로 대면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제를 하든지 복음을 전하든지 하나님 사랑만이 우리의 모든 삶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순결을 유지하며 사는 길입니다.
마태복음 6장 6절에 보면 주님께서 기도에 대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런데 우리의 기도 골방이 하나님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근심이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챔버스가 오늘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 사로 잡혀 있다고 말은 하는데 정말 ‘하나님께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지’ 말입니다.
챔버스는 우리가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태가 되면, 모든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가장 강력한 성벽을 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평강’이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평강이란 아무 문제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유지되는 편안한 상태입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시편 25편 13절을 인용합니다. “그의 영혼이 쉼을 얻네” 시편 기자는 삶에서 환난과 오해와 비방 등 어떤 상황을 만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평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 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염려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좋은 말씀 항상 묵상하며
더 깊은 믿음 갖도록 항상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