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 13:9
한 줄 노트
-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십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한 권리’를 누리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온전한 것을 생각하며 결단하기를 원하십니다.
묵상질문
지금 당신이 마주한 선택의 순간에서 ‘최선’의 선택과 ‘차선’의 선택은 각각 무엇인가요?
묵상 레시피
(창세기 26:12-33)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17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18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23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25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이삭과 아비멜렉의 계약
26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30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31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32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33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창세기 13:9)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 하나님은 이삭에게 어떤 복을 주셨습니까? (12-13,16절)
- 복으로 인해 어떤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까? (14-15절)
- 이삭은 자신이 판 우물을 몇 번이나 양보했습니까? (18-22절)
- 이삭은 아비멜렉과 어떤 계약을 맺게 됩니까? (31절)
- 그들은 이삭에 대해 어떤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까? (28-29절)
- 하나님은 그런 이삭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32절)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22절)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우물을 빼앗기고 자꾸만 자리를 옮기면서도 불만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신다’고 고백한다. 지경을 넓히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인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28절)
이삭은 아비멜렉이 평화 조약을 제의할 때 이전 사건을 꺼내거나 항의하지 않았다. 이삭에게는 계약 조건을 제시하고 권리를 행사할 만한 힘이 있었지만 아비멜렉의 제안을 모두 수용하고 잔치를 베풀어 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한 언약을 이삭으로 이어가게 하신다. 새로운 우물도 허락해 주셨다.
1. 권리주장 vs. 권리포기
챔버스의 묵상 글을 읽다보면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챔버스는 4개월 간 아브라함의 생애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 시리즈가 마무리 될 무렵, 챔버스는 런던에서의 편안한 사역을 마무리 하고 카이로 자이툰 부대에서 군인들을 섬기기로 결정합니다. 오늘 말씀 본문은 풍요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챔버스 자신의 결정과 닮았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믿음 생활을 시작할 때, 우리 삶에 펼쳐지는 화려하고 매력적인 일들을 경험합니다. 만일 이런 일들이 우리의 권리주장으로 가능한 일들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이때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납니다.
“그러나 만일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면 당신은 당신의 권리들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선택하시는 인생을 살 것입니다.”
권리를 포기하는 삶은 세상과 동일한 가치를 갖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권리포기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장하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권리를 포기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권리포기’의 모범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외로우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다고 해서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는 ‘하나님의 뜻’을 묻고 직면해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 곁에 가족이나 다른 성도들이 ‘함께’ 있다고 해도, 그들이 우리의 기도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홀로 하나님과 마주 해야 할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권리를 포기하는 기도’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최선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365 아침묵상]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최선의 것을 결정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하나님 손에 기꺼이 맡기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여러분에게 무엇을 언제 어떻게 주며, 또 무엇을 주지 말아야 할지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열심히 끈질기게 간청하되 겸손하게 자신의 뜻을 포기한 채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종종 시험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지 않기로 작정할 때,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믿음으로 살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믿음으로 살면 당신은 당신의 권리를 기쁘게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선택하시도록 허락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순종을 통해 우리는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 바꾸는 훈련 속으로 들어갑니다.
2. 최선 vs. 차선
두 번째 단락에서 우리에게 참 좋은 삶의 지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늘 ‘최선’과 ‘차선’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 입니다.
챔버스가 말한 “The good is always the enemy of the best.”(‘선’은 늘 ‘최선’의 적입니다.)라는 문장은 우리 인생에 꼭 새겨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 때 가장 큰 원수는 ‘죄’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의 권리’를 당연하게 생각하며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죄가 가장 큰 원수가 아닐까요? 이미 믿음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죄’를 구별할 정도의 능력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선’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죄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선’이 온전하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최선’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적당히 비난받지 않고 정당하게 내가 가진 권리를 누리는 ‘선’은 절대로 ‘최선’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보다 먼저 좋은 것을 선택하는 일은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었습니다. 그랬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비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 ‘마땅한 권리’였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이 마땅한 권리를 포기하고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넘겼을 때,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더 온전한 모습입니다.
창세기 17장 1절 말씀. “…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완전’이란 무엇이며, 차선이 아닌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대부분은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도록 주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의 권리에 따라 선택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