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0
한 줄 노트
-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이 맞지 않을 때,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 선택의 순간에서, ‘쉽고 어렵고’가 아닌‘하나님의 생명이 있는가’를 기준으로 묵상하며 결단해야 합니다.
묵상질문
오늘 나의 삶에서 하나님과 불일치되는 것은 무엇입니까?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습니까?
묵상 레시피
(누가복음 22:47-53)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고린도후서 4:10)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예수님께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47-48절)
-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예수를 잡으러 왔습니까? (52절)
-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49-50절)
-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51절)
-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53절)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48절)
입맞춤은 애정과 존경, 사랑의 표시이다. 그러나 유다는 사랑의 표시로 배반의 ‘군호’를 짰다. 존경의 모습으로 다가왔으나 실상 그는 배신자였다.
이것까지 참으라(51절)
문자적으로 ‘이것(혹은 이 정도)까지 허락하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문맥상 ‘이 이상은 안 된다’, ‘이 정도로 그치라’로 해석된다. 요한복음에는 칼을 든 자가 베드로였다고 언급된다(18:10).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칼을 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이루셔야 한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불일치 속으로 들어간다.
이제는 너희의 때요(53절)
마가와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에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너희의 때’는 적대자들이 행동하는 때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지정되고 허용된 시간이다.
1.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이 맞지 않을 때
오늘 묵상은 번역된 제목보다 영어 제목이 훨씬 더 요점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The habit of enjoying the disagreeable’ 이 제목을 ‘나의 뜻과 맞지 않는 불쾌한 일을 즐기는 습관’이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 오늘 묵상에 나오는 ‘역경’이라는 말을, 전체적으로 ‘나의 뜻과 맞지 않는 불쾌한 일’로 해석하면 챔버스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들고 싶은 습관은 ‘우리 안에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며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구원받기 위해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우리를 통해 나타내기 위해 믿습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생명을 드러내는지의 여부는 ‘역경’(나의 뜻과 맞지 않는 불쾌한 일)을 당해보면 압니다.”
[존 비비어의 순종]이라는 책에 보면 저자의 경험 속에서 이러한 상황을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큰 소리로 물었다. “왜 저한테 문제가 있다고 하시는 겁니까?” “너는 계속 공급이 없다는 타령을 하지만 이사야서에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1:19-20)라는 말씀이 있다.” 나도 잘 아는 말씀이었다. ‘그동안 아주 잘 순종했는데’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성령은 계속 말씀하셨다. "너는 이 사역에서 시키는 일은 다 순종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너희가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라 말하지 않았다. 나는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이라고 했다. 즐겨 순종한다는 것은 곧 네 태도다. 지금 네 태도는 불손하다!"
주님의 뜻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우리가 순종하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그러니 이 또한 역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서 이런 문제는 필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명령이 우리의 입맛에 전부 맞을 리는 만무합니다. 우리는 악하고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존 비비어는 사역지에서 열심을 다해 순종한다고 생각했지만 열매가 없다고 느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깨달음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시키는 일을 모두 순종하였더라도 즐거이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불손한 태도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과 나의 뜻이 맞지 않은, 유쾌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이 드러나기를 열망할까요?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이 맞지 않을 때,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드러나기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의견이 불일치할 때도 “주님, 저는 이 일에서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기쁨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면 주께서 우리 마음을 주장하십니다. 이때 우리 삶에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2. 새로운 습관 만들기
주님의 뜻과 나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을 때, 주님과 다투지 마십시오.
“우리의 모든 상황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얼마나 완벽하고 순결하신지를 드러내는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로 하나님과 다투면 성령님은 근심하십니다. 혹 이런 상황에서 ‘자기연민’에 빠지면 우리를 통해 아들의 생명이 드러나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드러나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뛰고 기대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하지 않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습관을 만들기 위한 선택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과 맞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불일치’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만드시고, 우리로 하여금 과감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셨다면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드러나도록 우리의 영혼을 잘 조율해야 합니다. 우리는 경험이나 기억, 지식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면 ‘불일치’의 상황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내키지 않는 일을 즐기는 습관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예수님의 생명이 내 삶을 통해 드러나기를 갈망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불쾌한 일을 해야 할 때, 이 일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오래 전 영성훈련을 인도할 때 한 장로님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열심히 봉사를 하다보면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있습니다. 둘 다 틀리지 않은데 무엇을 선택하죠?” 그 때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장로님, 똑같은 일을 하는데 두 가지의 길이 있다면 ‘더 어려운 방법’을 선택하십시오. 쉬운 일보다는 어려운 일이 하나님의 일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이 전부 어렵고 험난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지만 육신의 정욕을 가진 우리의 선택과 생명이신 주님이 주시는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 ‘쉽고 어렵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를 기준으로 삼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을 때 우리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