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행 24:16
한 줄 노트
-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기준보다 하나님 앞에서 훨씬 더 민감한 양심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 양심을 지키는 것은 신앙을 지키고 나를 지키는 일이며, 보이지 않지만 주어진 비전을 이루는 힘입니다.
묵상질문
나의 양심과 하나님 사이에 시비 거리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묵상 레시피
(고린도전서 6:12-20)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도행전 24:16)
16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 고린도 교인들이 생각한 ‘자유’는 무엇이었습니까?(12-13절 각 문장 앞부분)
-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12-13절 각 문장 뒷부분)
- 그리스도인은 누구와 연합한 자입니까? (17절)
- 우리는 누구에게 속한 자입니까? (19절)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12절)
영적 열광주의, 성령적 열광주의자들은 본인들이 이미 영적으로 종말론적 완성에 들어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육체적인 사건들은 사소한 것이라고 여겼다. 사회적, 성적 죄악을 괘념치 않았고 헬라 세계의 방종한 삶을 따라 살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크게 오해했다.
얽매이지 아니하리라(12절)
바울은 ‘모든 것이 너희 것이다(고전3:22)’라는 말을 오해하지 않도록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다시 설명한다. 성도의 자유는 개인적 만족이나 현재만의 자유가 아니며 무제한 적으로 열린 것도 아니다. ‘얽매이지 않는다.’는 주장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다. 그분의 권위에 종속된 자이다. 성도의 자유는 ‘하나님’ 외에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다(19절).” 성도는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인격적인 교제 가운데 영혼몸의 가장 아름답고 유익하며 선한 일을 바라고 행하며 누리는 사람들이다.
몸은 주를 위하여 있으며(13절)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주와 연합한 존재이며, 주님과 영적인 몸의 공동체를 이룬다(17절). 성도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기쁨과 근심을 깨닫는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몸을 값으로 사서 구속하셨다(20절). 성도는 죄의 종으로부터 해방되어 구원의 축복에 참여하게 되었다. ‘자유’란 이름의 유혹으로 다시금 죄의 종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1. 양심이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습관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이전에 나눴던 말씀들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첫째, 확고한 결심으로 첫 발걸음을 떼라.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자발적이지만 훈련을 통해 유지된다.
셋째, 습관을 우상화하지 마라.
그리고 오늘 묵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지체하지 않도록 민감한 양심을 계발하라고 말합니다. ‘양심’에 대하여 챔버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양심은 내가 아는 최상의 것에 마음의 초점을 두는 기능으로서, 사람마다 양심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한 양심은 영혼의 눈으로서 하나님을 향하거나 스스로 최상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향합니다.”
한동대 교목이셨던 김형겸 목사님이 학보에 썼던 양심에 관한 신앙 칼럼이 오늘 묵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양심은 세상의 도덕론자들이나 논하는 것이고 기독교인에게는 상관없는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기독교인은 오히려 더욱 더 예민한 ‘양심’을 갖고 사는 자들이다. 바울은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면서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다’고 지적한다(딤전 1:19).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선한 양심(The good conscience)’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경외(敬畏) 아래에 있는 양심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빛의 가이드(guide)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양심이다. ‘선한 양심’은 사람을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 유지시키는 원동력이다. 기독교 진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인생의 대 숙제는 어떻게 ‘나 중심’의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붙잡느냐 일 것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양심적이다’라는 말은 우리 영혼의 눈이 하나님을 향한 채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영혼의 최고 상태에서, ‘양심’은 우리에게 완전한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를 소개합니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지시합니다. 문제는 우리는 과연 양심의 지시에 순종할 것인가 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9절(새번역)에서 사도 바울은 양심에 대하여 이렇게 권면합니다.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선한 양심을 버리고, 그 신앙생활에 파선을 당하였습니다.”
2. 양심을 지키려면
양심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양심에 따라 사는 것 입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양심을 어기지 않고 잘 지내려면 나의 양심이 예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챔버스의 생각은 그가 줄곧 붙잡고 있는 신앙의 기둥과 같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 것이며, 어떻게 이 관계가 우리를 영적으로 예민하게 만들 수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예민한 상태에서, 양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된 상태’를 유지합니다. 이때 우리가 양심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생각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일치된 상태’에서 우리 영은 어떤 상황에서도 새롭습니다. 여기서 새롭다는 말은 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신선하게 대응한다는 뜻입니다.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로마서 12장 2절이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성령의 세미한 속삭임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성령님은 언제나 작고 사소한 부분까지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음성은 ‘천둥’처럼 오지 않고 아주 ‘세미하게’ 들리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무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가 언제인가요? 세상의 걱정과 근심으로 마음이 번민할 때나, 세상의 소리들이 주변에서 시끄럽게 들릴 때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주님 앞에 마주설 때, 주님은 아주 작은 음성으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며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습관’ 중 네 번째 묵상입니다.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갖는 습관에 대하여 챔버스가 말합니다.
“우리의 양심을 예민하게 하는 것은 내면 세계를 언제나 하나님께 열어두는 끊임없는 습관입니다.”
우리 내면을 하나님께 열어놓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내면에서 하나님과 ‘시비’(debate)거리가 생겼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세 감지할 것입니다. “왜 내가 이것을 하면 안 되지?”라는 의문이 들고 내적으로 시비가 일어난다면, 이미 잘못된 길에 들어서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민한 양심을 통해 말씀하실 때는 ‘시비’를 따지면 안 됩니다. 혹시 우리가 이 양심의 소리에 불순종해,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는 순간 하나님과의 ‘내적 교통’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니 양심에 거리끼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려놓고, 우리의 내적 비전이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선한 양심을 지키는 습관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예민하게 하며, 양심에 거리끼는 것은 단호하게 내려놓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