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벧후 1:7
한 줄 노트
- 쉽지 않은 ‘그 사랑’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면 가능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 ‘그 사랑’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묵상질문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도 참아주셨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묵상 레시피
(마태복음 3:16-17)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베드로후서 1:7)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 예수님은 어느 시점에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16절)
- 하늘에서부터 어떤 소리가 있었습니까? (17절)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16절)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렸다. 묵시문학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질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겔1:1, 계4:1,11:19,19:11).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다((1:18).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나님께서 하늘을 여는(헬, 에네오크테사이) 장면을 보았다. 세례와 성령 강림 사건은 왕의 즉위식을 연상케 한다. 예수님의 사역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예수님 안에서 인간이 하늘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절)
예수님은 하늘의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받았다. 유대인들은 이 칭호를 ‘메시아’와 동일하게 여겼다. ‘사랑하는(헬, 호 아가케토스)’은 ‘유일하게 사랑한다’는 의미로 ‘선택한’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시2:7). ‘내 기뻐하는 자(헬, 엔 호 유도케사)’는 이사야 42장에 사명을 완수할 ‘종’을 배경으로 한 표현이다. 하나님은 하늘의 음성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고난 받으실 것, 구원을 가져다주실 것을 선포하고 있다.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16절)
예수님은 아직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 선포도, 가르침도, 치유와 이적도 보이지 않으셨다. 자신이 누구인지 검증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성과도 아직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례 받고 올라온 그 순간의 예수님 자체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신다. 인정하신다. 하늘을 여시는 하나님과, 그것을 보는 예수님의 관계로부터 이미 존재와 소명, 사명의 방향이 결정된다.
1. 그 사랑이 그렇게 어렵다
어제에 이어 5월 16일까지 계속되는 묵상은 1914년에 챔버스가 한 주에 한 번씩 성경훈련대학 학생들에게 강의했던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습관’이라는 제목의 이 시리즈는 챔버스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내 비디에 의해 빛을 보게 됩니다. 비디는 이 원고를 ‘기도동맹’이라는 단체에 보냈습니다. 덕분에 1926년부터 1928년 사이, 매달 잡지에 원고가 실릴 수 있었습니다. 이 무렵 비디는 챔버스의 글을 모아 1927년,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출간합니다.
오늘 묵상의 제목이 흥미롭습니다. 원문 제목은 ‘You won’t reach it on tiptoe’입니다. ‘발끝으로 서도 닿지 못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실감나게 묘사한 문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사랑이요, 그래서 ‘훈련해야 할 사랑’입니다. ‘사랑’은 참 좋은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추상적이고 막연하기도 합니다. 챔버스가 아주 멋지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보다 어떤 한 사람을 가장 좋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영적으로 그러한 사랑을 원하십니다.”
이 사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오로지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부어져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에 최우선 순위에 둘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을 무엇일까요? 성령은 우리 속에 있는 위선과 경건한 척하는 것들을 부수어 가십니다. 이런 것이죠.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내가 사랑스러워서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분의 속성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심을 알려주십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은 발끝으로 서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오십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애쓰고 노력했지만 지쳐버렸습니다. 오늘 그런 우리들에게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과 같은 사랑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이라.”(요 15:12)
그리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보여주었던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어라!”
2. 그런데 그 사랑이 가능하다
이 사랑은 우리의 능력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다루어 오셨는지를 볼 때, 가능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볼 때 이기심과 경박함,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그 깨달음을 통해 세상에 나아가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그 사랑’을 행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두려움에서 사랑으로]라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족이나 교회가 당신을 사랑했든 사랑하지 않았든, 당신에게 도움을 주었든 상처를 주었든, 그전부터 당신은 하나님께 온전히 사랑받았다. 당신이 온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당신이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 자신이 선택받고 복 받은 자임을 마음으로 알면 우리는 남들 또한 선택받고 복 받은 자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온 인류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들로 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다. 삶과 죽음의 여러 측면을 두루 직시할 때,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께 “저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아뢸 수 있다. 이 부분을 챔버스는 이렇게 요약해서 말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 따라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학문과 명성의 길을 떠나 들어갔던 캐나다 라르쉬 데이브레이크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보편적인 인류애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어느 모로나 사랑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사랑받았음을 마음 깊숙이 깨달은 사람은 다른 사람도 동일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마음으로 감동만 느끼고 노력하지 않으면,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고도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했던 종과 같게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근거로 성장하면, 은혜 가운데 우리 속에 치솟는 화를 누를 수 있을 것입니다. 챔버스가 말합니다.
“나는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하기 때문에 화가 치밉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동의하지 않았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자연적인 사랑이든 영적인 사랑이든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지 않으면 그 사랑은 흘러가지 않습니다. 며칠 전 챔버스가 ‘자발적 사랑’에 대하여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랑은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훈련에 의해 유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이 훈련에 의해 유지될 때, 비로소 우리 안에서 사랑이 가능합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일수록, 우리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유지될 수 있게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