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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최고봉

선물보다 주님을 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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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너를 위해 큰일을 찾느냐


렘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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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노트

  • 기도는 구하는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기 원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우리의 ‘최선’이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습니다.

묵상질문

지금 당신의 최선이 하나님께 정말 최선이라고 확신하십니까?


묵상 레시피

◆로마서10:1-4 + 예레미야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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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0:1-4)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레미야 45:5)
5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바울은 누구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까? (1절)
  •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2절)
  • 이에 대한 바울의 평가는 어떠합니까? (2-3절)
  •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열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4절)

내가 증언하노니(2절)
바울은 형제인 이스라엘에게 자신도 그와 같은 실수를 범했다고 고백한다. 청문회에 나온 증인의 모습이다(martyro). 바울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이스라엘이 합리화하는 부분과 실제 범하는 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울’의 열심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언약적 성결에 기반 한 것이었다(출20:5,34:14, 신4:24,5:9,6:15, 수24:19). 그러나 ‘사울’과 이스라엘은 옛 언약에 머물러 있었으며 하나님의 역동적인 일하심, 하나님의 새 언약인 예수 그리스도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4절).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 힘써(3절)
이스라엘의 열심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표출되는 종교적 열정으로 변해갔다. 그들의 봉사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위임’에서 ‘율법적인 행위’로 바뀌었다. 이러한 과정은 어느 날 우연히 실수로 생긴 것이 아니다. ‘세우려 힘쓰는(헬, zetountes stesai)’ 의도적인 노력이 있었다.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해 간 것이다.


◆ 묵상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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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잘못된 관심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 중에 하나는 늘 ‘위대한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신앙인들을 보면, 그들의 사역 가운데 위대한 일을 이루거나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꿈꿨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이들이 순종하며 행했던 일들을 위대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늘 주의해야 할 것은 거짓된 관심과 참된 관심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묵상의 핵심도 ‘주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주님의 선물을 받는 것보다 주님과 더욱 가까운 관계가 되는 데 관심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이 그분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축복이라고 여기는 ‘위대한 일’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일시적이고 우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면, 올바른 관심을 가지고 올바른 축복을 구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구하는 것이 ‘물질’이라면, 아직 온전한 헌신의 첫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A. W. 토저는 [하나님의 길에 우연은 없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물들은 여럿이지만 그분이 주신 최고의 선물은 오직 하나, 바로 그분 자신이시다. 그분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분 자신을 그분의 백성에게 주기를 아주 간절히 원하신다.


또한 C. S. 루이스는 [기도의 자리로]에서 어거스틴이 했던 유명한 말 ‘하나님은 빈손에 주신다’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양손에 짐이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짐이 늘 죄나 세상 염려는 아닐 겁니다. 우리의 방식대로 그분을 예배하려는 조급한 시도도 때로는 짐이 되니까요.”


토저의 말처럼, 하나님의 선물은 여러 가지 이지만 그 중 최고의 선물은 주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선물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양손에 짐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원하지 않던가, 주님보다 못한 선물에만 만족하던가. 우리 불신앙의 문제는 둘 중 하나에 기인하지 않을까요?


챔버스는 4년간의 영적 암흑기를 지나며 성령님을 구했지만, 그 당시 하나님은 그에게 쉼과 평강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챔버스 자신이 그 때 주님을 구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령님을 구한 이유가 능력을 받아 자신이 뭔가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옳지 않은 것을 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8절 말씀에 보면 “…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셨던 주님의 말씀과 배치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명확한 정리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구하는 그 내용이 바르게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요, 우리가 구하는 이유는 그 구함을 통해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구하지 않는 자는 지금 자신이 구하는 것이 주님께 올바른 것인지도 구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 구하는 기도를 통해 주님의 성품을 점점 더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2. 무엇을 구하는가?

하나님께 우리가 무언가를 구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하나님의 관심’과 일치하는 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오, 주님! 성령 세례를 제게 부어주소서’라고 기도하는 내용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충분히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여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챔버스는 우리는 때때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며 또한 왜 그것을 원하는지 자신에게 질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현재의 축복과 행복이 아니라 궁극적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궁극적인 완전을 위해 현재의 완전을 무시하시는 분이십니다.”

(God always ignores the present perfection for the ultimate perfection.)

(번역에는 빠져 있지만 좋은 문장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최선일수록 최악을 낳는 관계’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최선을 다해 구하는 것들이 우리를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잘 알려진 톨스토이의 우화입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어느 작은 마을에 서로 사랑하는 소와 사자가 있었습니다. 소는 사자의 용맹함과 과묵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고, 사자는 소의 자상함과 부지런함이 마음에 들어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소는 최선을 다해 맛있는 풀을 준비해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싫었지만 참았습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결국, 소와 사자는 음식 때문에 다투게 되었고, 결국 둘은 애정이 식어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너를 위해 최선을 다했어!” 소는 소의 눈으로 사자는 사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니, 그들의 세상은 혼자 사는 무인도입니다. 소는 소의 세상에, 사자는 사자의 세상에 살 뿐입니다. 상대를 알지 못한 최선, 그 최선은 최선일수록 최악을 낳고 맙니다.

‘최상의 하나님께 나의 최선을 드릴 때’ 전제 조건은 하나님을 ‘앎’에 있습니다. 주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우리의 최선은 최선일수록 최악을 낳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할 것은 선물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위해 일하시는지 알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구할지도 명확해지지 않을까요? 여기서도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지 못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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