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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최고봉

영생을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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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해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6: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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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노트

  • 아무리 연약한 성도라도 ‘내려놓으면’ 주님의 거룩한 능력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작은 능력이라도 우리의 능력을 주장하면 주님의 생명이 가려집니다.

묵상질문

부활의 능력이 계속 우리에게 임하도록, 오늘 우리가 내려놓아야 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은 무엇일까요?


묵상 레시피

◆열왕기하 5:1-14 + 로마서 6: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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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5:1-14)
1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5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로마서 6:9-11)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나아만의 지위와 신분은 어떠했습니까?(1,5,9절, 용어설명 참고)
  • 그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얼마만큼 심각했습니까? (1,7-8절)
  • 치유를 바라는 나아만의 간절함을 묵상해 보십시오. (4-5절)
  • 엘리사의 처방은 무엇이었습니까?(10절)
  • 나아만의 분노와 신하의 조언을 묵상해 보십시오. (11-13절)
  • 나아만은 무엇을 행했고, 어떤 결과를 보았습니까? (14절)

    내가 반복적으로 분노하며 넘어지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내려놓고 양도해야 할 표면적, 내면적 영역은 무엇입니까?

크고 존귀한 자니, 여주인(1절, 3절)
‘존귀한 자’는 얼굴이 들려진 자라는 의미가 있다. 즉,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그의 아내에게 사용된 ‘여주인’(히,그비라)은 귀부인이나 왕비, 대비 등을 지칭하는 단어다(왕상 11:19, 15:13, 왕하 10:13). 나아만과 부인의 신분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나라를 구한 자였다. 왕은 그를 ‘구하려’ 했다. 심각한 병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예우를 받을 만큼 존재감 있던 사람이었다.

부위 위에 흔들어 (11절)
‘흔들어(히, 헤니프)’는 ‘올리다’라는 뜻이 있으며 ‘올려 드리는 제사’로 볼 수 있다. ‘부위’로 번역된 히브리어는(함마콤) ‘성소’, ‘그 장소’라고 번역할 수 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직접 나와 지위에 걸 맞는 ‘치유의식’, 종교행사를 거행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는 병 낫기에 관심이 있었다. 병을 낫게 하시는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14절)
레위기 14장에 나오는 문둥병자의 의식을 상기시킨다. ‘잠그다(히, 타발)’라는 용어는 제사, 정결 의식에서 쓰이는 용어다. 레위기 14장은 문둥병자의 ‘치유’ 절차라기보다, ‘완쾌 후’의 절차이다. ‘깨끗하다’는 것은 단지 피부가 온전하게 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일원으로 들어온다는 의미를 갖는다. 엘리사는 나아만의 치유만을 위해 요단강에 보낸 것이 아니다. 하나님 신앙을 위한 과정으로 인도한 것이다.


◆ 묵상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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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나눔

영생은 무엇일까요? 3일간 계속 나오는 ‘도덕적 결단’이라는 말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도덕적 결단이 ‘죄’로부터 완전히 죽는 실제적 결단이라는 것을 기억하시나요? 죄에 대하여 죽으면 우리에게도 주님께 나타났던 능력과 권능이 임합니다. 도덕적 결단은 우리의 의지이지만 이러한 능력과 권능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우리의 어떤 의지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무용지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역시 우리의 도덕적 결단이 없으면 우리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신앙의 원리가 있습니다. ‘십자가’만이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로 결단하지 않는다면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에게 전달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어렵다면 이는 우리가 죄에 대해 확실한 결단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도덕적 결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더 알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영생’은 ‘시간’과 관계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셨던, 그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하용조 목사님은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라는 책에서 ‘영생’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영생은 단순한 영원불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또한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삶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없는 영원한 시간은 불안합니다. 영생은 죽음 후의 무한한 세계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뜻합니다. 영생이란 또한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합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영생이란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가진 사람은 육신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육신이 그렇게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생을 가진 사람은 상황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게 된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도덕적 결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까요?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까요?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아무리 연약한 성도라도 그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한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 역시, 챔버스가 계속해서 고민하고 주장하는 ‘순종’과 연관이 있습니다. 순종은 ‘전적인 위임’ 즉,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을 ‘양도’(Yield)하는 것임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 우리의 삶을 내어드리는 것, 이보다 ‘순종’을 잘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묵상 글에서는 챔버스가 ‘let go’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 분이 하시도록’이라고 번역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고 오로지 그 분이 행하시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구절에서 챔버스는 “We have to keep letting go”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일하시도록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양도할 때, 하나님의 생명이 천천히 충만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우리 삶의 전 영역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우리를 양도할 때, 우리는 스스로 붙잡고 있던 것을 놓게 됩니다. 그것이 때로는 집착일 수 있고, 때로는 우리가 즐기던 어떤 것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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