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보 QT MY 메뉴
  • Home
  • >
  • QT
  • >
  • 이 땅에서 가장 미묘한 사명
이전으로
2021년 03월 25일 목요일
다음으로
이전으로
2021년 03월 25일 목요일
다음으로
주님은 나의 최고봉

이 땅에서 가장 미묘한 사명

통독표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 3:29
video poster

한 줄 노트

  • 우리에게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변명하지 않고, 잘한 일이 있어도 드러내지 않으며 살아가야 하는 미묘한 사명이 있습니다.
  • 삶에서 중요한 것은 의식적인 순종보다 주님과의 관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묵상질문

주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오늘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묵상 레시피

◆누가복음 9:28-36 + 요한복음 3:29
펼치기/접기

(누가복음 9:28-36)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요한복음 3:29)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 예수님은 산에 무엇하러 올라가셨습니까? (28절)
  •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시간에 무엇하고 있었습니까?(32절)
  • 제자들은 그 산에서 누구를 보았습니까? (30절)
  • 예수님은 그들과 무엇을 말씀하고 계셨습니까? (31절)
  • 베드로는 이 광경을 보고 무엇이라 말합니까? (33절)
  • 구름 속에서 들린 소리는 무엇입니까? (35절)
  • 신앙공동체에서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집중하여 보고 듣는 것이 있습니까?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31절)
별세에 쓰인 헬라어 단어는 ‘엑소두스’이다. 출애굽에 사용된 단어인데, 예수님이 죽음에서 멈추지 않고 장차 부활, 승천하실 것을 의미하는 단어다.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32절)
예수님은 기도 중에 ‘용모가 변화’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별세>라는 중요한 말도 놓쳤다. 그저 변모한 예수님과 엘리야, 모세만 보았다. 베드로는 신비적 경험에만 집중한다. 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드문드문 보았고, 드문드문 알았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35절)
베드로는 모세, 엘리야와 예수님을 동일선상으로 놓고 보았다. 그러나 하늘의 음성은 <그에게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셨음을 확증한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의 대명사로서 추앙받는 인물들이다.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의 완성이다. 제자들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집중하여 귀를 기울여야 한다.


◆ 묵상도움글
펼치기/접기

1. 무엇이 미묘한가?

오늘 묵상은 제목이 참 흥미롭습니다. ‘이 땅에서 가장 미묘한 사명’이라니? 결론부터 이야기 한다면,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역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아닌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어제 묵상에서 잠깐 언급했던 말씀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주님의 일을 하는데, 어떻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또한 일에 대한 보상과 칭찬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욕구인데, 이것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 세상에서 가장 ‘미묘한’ 사역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을까요?

“만일 나의 거룩함이 사람들의 관심을 주님께로 향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거룩은 정상적인 궤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나아가 사람들의 마음에 비정상적인 애착을 유발시켜 그 영혼들로 하여금 곁길로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유혹 중에 하나가 ‘명예욕’이 아닐까요? 보통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행한 일의 결과에 대한 보상으로 명예와 칭찬만큼 실제적인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오로지 하나님께 받는 인정만이 참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보내신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곰곰이 오늘 말씀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인간들에게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지는 사명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답이 분명합니다. 우리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시기하거나 미워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어떠한 평가로 인해 실망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미묘한 일이지만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이 당시 비서실에 근무하던 목사님과 나눴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젊은 목사님이 사람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해 화를 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 목사님이 조용히 다가오셔서 가만히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봐야 그 때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라고 알게 될 꺼야!” 그 말이 젊은 목사님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굳이 변명하지 않으려는 마음, 누군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도 고개를 쳐들고 나서지 않으려는 마음,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이 없어도 그 자리에서 묵묵히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데 자신만 드러나고 있다면 주님께 방해가 될 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고 있다면, 진정한 신랑 되신 예수님의 친구가 아닐 것입니다.


2. 순종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

챔버스가 사역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주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우리들이 종종 놓치는 것 중에 하나는 ‘열심’으로 인해 ‘관계’가 소홀해지는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 말씀에서 ‘신랑’과 ‘신랑의 친구’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의 역할이 신랑을 대신하지 않는 신랑의 친구로서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유대인의 결혼 풍습인 ‘쇼쉬벤’(Shoshben)이라는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어로 신랑 친구, 즉 ‘쇼쉬벤(shoshben)’은 당시 유대인의 혼례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부와 신랑의 대변자로 행동했는데, 청첩장도 만들고 혼인 잔치를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임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부 방을 지키다가, 안전하게 신랑에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역할을 소홀히 하여 신부를 엉뚱한 사람에게 내주면 혼인 잔치는 무산이 됩니다. 장시간 서성이며 신부를 지키던 쇼쉬벤은 어둠 속에서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무척 기뻐합니다. 자기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안도감 때문입니다.
쇼쉬벤이 신부를 신랑에게 내어주며 아쉬워하는 법은 없습니다. 신부는 신랑의 차지여야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사명은 바로 이러하였습니다. 신부인 이스라엘을 신랑인 예수님과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이 완수되었을 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그의 행복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세례자 요한의 말은 바로 그런 기쁨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손종태 목사님의 책 [갈망] 중에서 챔버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늘 ‘순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묵상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가끔 특별하게 순종할 만한 것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이때에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주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고 계속 주님과의 활기찬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종종 순종해야 할 때 순종하면 됩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순종의 순간’은 무언가 결정해야 할 때 필요한 것인데, 우리의 삶에 대부분은 일상적인 것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문제는 주님과 관계가 올바를 때에는 결정의 순간에 주님의 편에 서는 것이 쉽지만 관계가 잘못되면 결정의 순간에도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속적인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가로막는 것이 ‘우리의 사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챔버스는 여러 번 강조해 왔습니다. 사역에 열중하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이 참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의 열심 때문에 주님을 핍박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관계’란 끊임없이 주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마음을 아는 열심이야말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고린도전서 9장 26절에서 사도 바울도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로딩중...
0:00 0:00
닫기
1.0x
0.5 1.0 1.2 1.5 2.0
닫기

구독설정

구독한 콘텐츠는 MY구독에서 한번에 볼 수 있어요.

구독하기
통독 녹음을 해 보세요.
00 : 00 : 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