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한 줄 노트
- 같은 일을 해도 그것이 소명에 근거하는지, 상식에 기초한 일인지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 주님이 우리의 헌신을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우리가 유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묵상질문
우리가 주님께 그렇게 필요한 존재일까요? 주님이 우리의 헌신을 받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묵상 레시피
(룻기4:1-22)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5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7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8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12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사도행전 20:24)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기업 무를 책임을 진 첫 번째 사람은 이 일을 왜 거절하였습니까? (5,6절)
- 이로 미루어 보건데 그가 처음 이 일을 수락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4절)
- 보아스는 손해를 감수하고 왜 이 일을 수락하였을까요? (9-10절)
- 사람들은 보아스를 어떻게 축복하였습니까? (11-12,14-15절)
- 하나님께서는 보아스의 가문에 어떤 복을 주셨습니까? (13,17절)
네가 무르라(6절) 너를 위하여 사라(8절)
두 사람은 ‘무르라(히, 카나)’와 ‘사라(히, 가알)’는 말을 함께 사용한다.
여성인 룻을 사이에 두고 사용한 단어로는 좀 불편할 수 있지만, 두 히브리어 단어가 함께 쓰일 때는 본 의미인 ‘무르다’나 ‘사다’ 대신 ‘친족의 의무(권리)를 수행하다’라는 뜻으로 읽힌다. 사려 깊은 마음과 생각이 내포된 고귀한 표현이다. 기업 무르는 일은 생각에 따라 의무이기도 하고 권리이기도 하다. 보아스는 이 일을 권리(고귀한 일)로 여겼다. 그래서 그가 우선권이 있던 첫 번째 고엘(기업 무를 자)을 찾은 것은 책임을 전가하기 위함이 아니라 먼저 권리를 행사 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짧은 기도
주여, 주님의 발 앞에 앉는 것은
이 세상 가장 높은 자리에 앉는 것보다 낫습니다.
영원한 하늘 나라 보좌에 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의 거룩한 제단에
제 천한 몸을 번제로 드립니다.
은혜로써 저를 받으소서.
이와 같이 하여 어디든지, 무엇에든지
주님의 거룩한 뜻에 봉사하도록 저를 사용하소서.
선다 싱_저를 받으소서 중에서 (1889-1929, 인도의 기독교 지도자)「사귐의 기도를 위한 기도 선집」120
1. 상식과 소명이 무엇이 다른가?
오늘 묵상에서도 챔버스는 ‘상식’과 ‘소명’의 차이를 들어서 올바른 신앙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이런 태도를 갖고 있지는 않나요?
“비전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쉽습니다. 소명 없이 주를 위해 일하는 것도 쉽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요청에 의해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챔버스의 말들은 그가 해왔던 사역과 그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글을 보면 챔버스의 삶이 상당히 빡빡하고 드라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챔버스의 글과 그의 강의는 아주 유머러스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묵상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챔버스의 전기에 보면 미국 신시내티에서 강의를 하던 때, 자신을 돕던 부부와 펜실베니아에서 겨울 휴가를 함께 지내며 즐겁게 눈썰매를 탔던 경험을 나눈 적도 있습니다. 또한 아내와 함께 미국 전도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때, 하나님을 신뢰하며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낮잠을 자는 것이다’라고 했던 일도 기억합니다.
챔버스가 소명을 이야기할 때, 이것이 결코 무미건조한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던지 소명과 관계된 삶을 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명을 주실 때, 그 속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관계 속에는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도, 그리고 따뜻한 우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챔버스가 지적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들이 소명이 아닌 인간적 상식에 기초한 일들이 될 때입니다. 인간적 상식이 원하는 성공과 여유들이 소명과 관계없을 때, 우리를 얼마나 세속적으로 만들고 우리를 얼마나 타락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챔버스의 글 중에 ‘찌르는 막대기’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늘 우리의 기억 속에서 찌르는 막대기가 됩니다. 그 때, 우리가 하는 일들은 더 이상 상식에 근거한 것들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유용함은 우리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챔버스는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본문으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사명을 위해서만 자신의 생명을 귀중히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사역 자체’를 구별하지 못할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주님을 위해 ‘사역’을 한다고 하는데, 그러한 열심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진정한 헌신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역 자체를 사명으로 혼동하기 시작할 때, 우리들에게 ‘유용성’이라는 논리가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사역’은 사명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지 사역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명이 사라진 ‘일’을 열심히 하면 주님보다 ‘나’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주님을 따라 가려기보다는, 우리들 자신이 어디서 가장 유용한 사람인지를 따지게 되는 것이죠.
“당신이 유용한가 아닌가를 절대로 고려하지 마십시오. 다만 당신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언제나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유용성’에 초점을 두는 순간, 하나님을 섬기는 데 ‘허비되는’ 시간을 참지 못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허비되는’ 시간을 기꺼이 감내하는 희생의 마음이 있다면, 주님의 일을 위해 기꺼이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유용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마음 때문에 택함 받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유용성’이라는 기준이 자리 잡고 있는 한, 예수님의 발에 향유옥합을 깨뜨렸던 마리아를 비난했던 가롯 유다가 우리 속에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언젠가 말씀을 묵상하다 많이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쓰시는 이유는 내가 주님께 그렇게 유용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말입니다. 주님께 나를 드린다는 것이 위대한 헌신인 줄 알았는데, 그저 내가 주님께 골칫덩어리임을 알았을 때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헌신이 얼마나 가치 없는 일인지를 알았을 때 말입니다. 그 때 불렀던 찬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