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 1:1
한 줄 노트
-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삶의 현장 한가운데로 인도합니다.
- 소명자는 자신의 거룩함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묵상질문
오늘 당신의 삶의 목적은 자신의 ‘선함’을 이루는 것입니까?
아니면 구속의 은혜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까?
묵상 레시피
(고린도후서 10:7-18)
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9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10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11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12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13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4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16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로마서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고린도교회에 거짓 사도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성도들과 바울 사이를 이간질 하였습니다.
- 고린도 교인들의 판단 조건은 무엇이었습니까? (7절)
-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했습니까? (7절, 11:23절 참고)
- 거짓 사도들의 자랑은 누구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까? (12절)
- 바울의 자랑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까? (13절)
- 거짓 사도들이 자랑하는 것들의 실상은 무엇이었습니까? (15-16절)
- 참된 자랑과 인정은 어디에 기인한 것입니까? (17-18절)
외모만(7절) (헬)프로소폰
외형적인 면, 혹은 ‘바로 눈앞에’ 일어나는 일을 가리킨다.
자기를…자기로써…자기를…자기로써…자기를(12절) (헬)헤아우투
거짓 사도들이 스스로 만든 표준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자랑하였음을 매우 강조하기 위해 반복하여 사용됨
한계(13절) (헬)카노노스
원형은 (헬)카논으로 본래 ‘갈대, 막대자’를 가리킨다. 측량을 목적으로 하는 기준, 생활 지도를 위한 규칙, 원칙 등을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 활동의 척도를 하나님의 ‘분량’으로 잡았다. 즉 다메섹에서 받은 소명, 이방인을 향한 선교적 사명으로 볼 수 있다(갈1:15-16).
짧은 기도
예수님,
제가 원하는 것은
점점 더 많이
모든 것을 주님께 포기하는 것입니다.
가면 갈수록
제가 어디로 가는지 더 모르겠습니다.
저를 인도하시고
완전히 다스리소서.
토마스 머튼_제가 원하는 것(1915-1968, 미국의 수도사, 사회운동가) 「사귐의 기도」 228
1. 부르심의 이유
팀 켈러 목사님의 책 [일과 영성]은 이 세상을 사는 크리스천들이 일상에서 어떻게 복음적인 삶을 살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성도의 삶의 이유는 ‘거룩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위에서 복음을 선포하도록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는 오늘날 교회가 다루는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제에 대한 고민이 오늘 묵상에서 그대로 묻어납니다. 챔버스야말로 그의 삶의 일상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지 고민했던 사람이죠. 그러한 고민은 그로 하여금 안정된 런던의 성경학교의 사역을 뒤로하고 1차 세계대전의 중심으로 사역지를 옮기게 했습니다.
‘지금 복음이 필요한 삶의 현장은 어디일까?’ 그런 고민이 아니었을까요?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43살의 나이에 삶을 마감한 곳은, 그가 살고 있던 동시대의 가장 치열한 삶의 한가운데였습니다. 부르심을 따라 그가 세웠던 런던의 성경학교에 머무는 것이 시대적 삶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을까요? 1차 세계대전의 한가운데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중동으로 파병되는 병사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긴박성이 부르심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이집트로 가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부르심’이란 늘 우리 삶의 한 복판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장 1절 말씀을 통해 우리는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부르심의 실체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부르심의 자격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알아야 흔들리지 않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챔버스는 말합니다.
“우리의 거룩은 우리 안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속의 결과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구속의 결과로 나타나는 인간의 선함에 둔다면, 시험이 올 때 그 믿음은 무너집니다.”
바울이 그랬듯이 우리는 ‘스스로 구별’되는 부르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에서 우리의 소명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이 우리를 구속하거나 사명자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거룩한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사명이 평균 이상의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 자랑하기를 즐겨했던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위선적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부르심의 자격이 철저하게 구속의 은혜에 있다면, 부르심의 이유 역시 구속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구속의 은혜가 아닌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사명자로 붙들어 주지 못합니다. 나의 힘이 아닌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2. 왜 넘어질까요?
1월 15일 묵상에서 챔버스는 우리들에게 ‘무덤’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진정한 거룩함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는 우리의 무덤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착각하고 넘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더 알려는 노력보다 자신들의 거룩함을 위해 열정을 쏟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사역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기도동맹’이었습니다. 이 단체를 통해 챔버스는 동역자를 얻었고 많은 후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들 안에 내재된 위험성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거룩하게 살려는 노력으로 뭔가 자격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함 같은 것들이죠.
그래서 챔버스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이요, 우리가 넘어지지 않고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역자들이 실패해서 쓰러지는 이유는 그들의 관심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자신의 의로움을 보이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인생 그대로 오직 십자가의 구속의 흉한 실체만을 의지하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나 자신이 보기에 더욱 만족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나님, 나를 위해 뭔가를 해주십시오.’ 이들은 아직 하나님의 복음의 실체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무작정 맡기지 못합니다. 오직 나 자신의 성품 개발에만 관심이 있는 한,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자신의 거룩함을 위하여 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해 질수록 자신의 내면에 있는 더러움을 보았습니다. 그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지만 사명자로 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니, ‘죄인 중에 괴수’로 고백하고 나니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기 전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 문제가 없던 때,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관계가 깨어지고 나니 벗은 몸을 가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을 자꾸 의식한다는 것은 영적 상태가 ‘자기중심적’이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