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며 주목하고 계십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며 신뢰하느냐가 관건입니다. 금식은 단식 투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나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선전 도구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잘못된 금식을 보시고, “나와 무슨 상관이냐”며 책망하셨습니다(슥 7:5). 예수님은 경건의 훈련을 통해 내 의를 드러내려는 유혹을 경계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기도는 하나님과 무관하며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계획과 생각과 때 등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도의 온전한 본을 보이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나님과의 관계는 삶으로 연결됩니다.
“기도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너희가 하는 일이 연결되어 있다”(마 6:14, 《메시지》 성경). 본문은 주기도문에 붙은 사족이나 부연이 아니라 기도의 정의(definition)로서 결론에 해당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향해 기도하게 하신 예수님은 이제 그 뜻대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삶의 강력한 표지입니다. ‘용서’는 노력을 기울여야할 특정한 사안이 아닙니다. 내 뜻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며 순종할 때, 자연히 드러나게 되는 삶의 변화입니다.
나는 기도와 연결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❶ 나의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입니까, 그리스도인의 기도입니까?
❷ 참 기도자로서의 표지가 삶 속에 드러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경건의 훈련을 통해 내 의를 드러내려는 유혹을 경계하십니다.
❶ 관련 설교 – 2022 변화산 2.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만 기도하기(서론)
제가 군목이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지휘관이 교인이었기 때문에 저는 사랑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제가 열심히 군종 활동을 한 것도 사실이지요. 하지만 점심때가 되어 참모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면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좀 알려야 하는데 있는 그대로 말하기는 쑥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제 선행을 드러냈던 기억이 납니다.
“어제 밤에 보니 병사들이 참 잘 걷더군요.”라고 하면 지휘관이 여지없이 저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어제 밤 훈련하는 데 계셨습니까?”
“아니 뭐 그냥 위문품을 가지고 잠시 들렸습니다.”
제가 뭐 그렇게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해야 할 일을 했고, 그것을 지휘관에게 알렸을 뿐입니다. 물론 제가 그 일을 한 것이 지휘관에게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고 병사들을 위해서 한 일도 명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을 드러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죠.
바리새인들에게는 금식의 동기 자체가 자신의 거룩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는 행동과 실제의 목적이 다른 “위선”이었습니다.
“너희는 이미 상을 받았다!” 이 말씀은 진짜 상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질타하시는 주님의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금식은 자신의 유익과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신앙적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계획과 생각과 때 등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❷ 관련 설교 – 2022 변화산 2.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만 기도하기(서론)
좋은 예화가 될 듯합니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예전에 한 기독교 대학의 예배 시간에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청중석 맨 앞자리에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다. 예배당에는 주로 젊은이들만 모였기 때문에 그들 부부가 거기 앉아 있는 모습은 다소
생뚱맞게 보였다. 예배가 끝난 후 이들은 나와 이야기 하고 싶다며 가슴 아프지만 한편 훈훈해지는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이들 부부에게는 말도 못하게 반항적인 딸이 한 명 있었다. 그 아이는 고트족들이 입고 다니는 검은 복장에 검은 립스틱을 바르고 팔뚝에 가득한 문신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다녔다. 심란한 외양보다 훨씬 더 큰 문제는 아이의 공격적인 태도였다. 부모는 오랫동안 열심히 딸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다. 딸이 분노와 반항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녀의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 딸은 자신은 기독교 대학에 갈 것인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곳에서 쫓겨나기 위해서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아이는 그토록 크리스천들을 경멸했다.
이들 부모는 연 초에 있었던 일을 내게 꼭 말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이 학교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던 그 때, 딸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인생을 돌이키는 결정을 한 후에 그 딸은 기숙사로 돌아가 부모님에게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아이는 그동안 부모님에게 주었던 모든 상처에 용서를 구했다.
아이는 자신이 성령을 체험하고 확실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설명했다. 아이는 집에 가서 부모님이 자신에게 언제나 원했던 것처럼 부모님을 끌어안게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는 이후로 가족에게 좋은 일들이 펼쳐질 모습들을 고대했다. 편지는 그렇듯 아름다운 생각들로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시내 근처에서 편지를 부치고 난 후 비극이 일어났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이들 부모는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딸을 땅에 묻었다. 그들은 딸아이와의 관계가 화해와 치유 없이 끝나버린 것에 대해 얼마나 절망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장례를 치르고 사흘 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딸이 부친 귀한 편지가 우체통에 도착한 것이었다.
나는 어리석게도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딱하게도 편지가 너무 늦게 도착했군요.”
그 부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무 늦은 게 아닙니다! 우리 딸이 편지에서 아름답게 소망하고 있듯이 아이가 우리를 끌어안고 우리가 아이를 끌어안을 때가 올 겁니다.”
하나님은 절망으로부터 소망을 끌어내는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 같은 순간에 하나님은 새롭게 시작하신다.
내 뜻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며 순종할 때, 자연히 드러나게 되는 삶의 변화입니다.
❸ 관련 도서 – 『칼과 칼집』 (한홍 저, 두란노, 2002.06.10.)
위선은 한자로 ‘거짓 위(僞)’에 ‘착할 선(善)’을 쓴다. 즉 선한 것인 양 위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위선이란 결국 도덕적 결벽성 때문에 생긴 것이다. 미국 서부의 한 대형 교회에서 과거에 치명적인 도덕적 죄를 지은 적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더니, 이들 중
대부분이 평소에 “나는 절대 그런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라고 큰소리치던 도덕적
결벽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개혁을 한다. 부정부패를 척결한다. 새 역사를 만든다”고 하면서 정의의 칼을 높이 드는 사람들의 문제는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개혁되어야 할 대상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목사는 자신이 하는
설교를 자신이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 부족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참된 목자의 자격을 갖게 된다. 남편이 잘못했다고 사과할 때 아내는 비로소 남편을 존경하고 위하게 된다. 부모가 말만큼
살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 때문에 자녀들이 제대로 못 크고 있음을 인정할 때, 그 자녀는
비로소 부모의 마음으로 몰입해 들어온다.
인간은 한없이 약한 존재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약함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는 우리의 어줍지 않은 자존심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한 대로 일일이 다 보응하시면 우린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뻔히 아시면서도 모르는 척 우리 잘못을 덮어 주시고, 속아 주시고, 끊임없이 사랑해 주셨다.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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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도의 여정
기도란 참으로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서만 가능한 소통의 대화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에 동역하는 특권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고백 행위로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어떤 간구를 하고 그 분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은 무한하며 기도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매 순간마다 믿음으로 수시로 하나님께 기도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될 때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기도는 마음의 문을 열어 영혼의 호흡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것을 허용하여 친밀한 교제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3:20)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롬8: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니라
2. 기도생활의 실제화
기도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너희가 하는 일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향해 기도하게 하신 예수님은 이제 그 뜻대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 계획과 생각과 때 등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기도는 세상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삶으로 변화되기를 갈구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적인 영혼의 삶을 하나님의 성령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평안을 주고 기쁨을 주며 구원에 이르는 진리의 길로 성령님이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원천으로 나아가 그 풍요로움을 맛보고 실제로 기도 안에서 주님과 깊은 만남을 체험하게 되는 소중한 일이며 희망의 빛이 됩니다.
묵상기도로 깨달은 말씀을 내면화 하고 인격화하는 것을 추구하고 내면화된 말씀을 삶속에 실현하는 것을 추구하며 말씀을 삶속에 육화시키는 것입니다.
묵상기도를 통해 주님과 깊은 만남을 체험하여 내면화된 말씀을 삶속에 실현되어 육화시키고 하나님의 삶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기도한대로만 산다면 얼마나 신실하고 온전한 사람일까 생각해 봅니다.
내 뜻을 부르짖고 관철시키고 떼쓰는 기도의 모양을 버리고자 하니 하나님 앞에 앉아있을 때 잠잠해짐을 경험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께 갈등의 상황을 내어놓고 물으면 잠잠히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아직은 훈련이 안 되어 기다리는 시간 동안 집중하려고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목요찬양집회에 갔는데 앉아있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었습니다.
피곤하니 졸립고 부르짖지 않고 음성 듣기를 하고 있자니 잡념이 계속 떠올라서 입니다.
그러고보니 순간순간 하나님을 찾는 습관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장소와 시간이 예전처럼 갈급하진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삶에서 매순간 하나님과 대화하는 친밀하고 애교많은 자녀로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배려하고 기도하며 드는 마음에 순종하는 인생이기 원합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시간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자리
나의 관심은 누구에게 향하는가?!
18. 사람에게 보이지 말고 은밀하게
계셔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만
보이도록 하여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나의 믿음의 깊이도 드러나고
엄청 친밀한 척 위선적 기도로
뽐내고 싶은 마음들도 내면에
꿈틀거림을 아시노라..
누구를 위한 기도인가?!
욥16;19 보라 지금도 내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내 보증인이
높은 곳에 계신다.
억만번 외쳐도 메아리로 돌아오는
기도라면..시간과 에너지가 낭비라ㅠ
온맘다해 전심으로 주알기 원하는
간절함으로 하늘을 향해 맘을
열기 원하는 자들
반성하며 늘 정결하길 구합니다
나는 없고 주님만 있는 삶
구하여도 여전히 내가 드러나오니
사람과 하나님의 주위를 끄는 자로
살지 않게 하시고..ㅠ
진실로 내 마음과 삶이 보증되는
삶을 이루게 하소서~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