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건강한 영혼은 용서받음과 용서함의 은혜를 모두 누립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신다거나 그분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영혼, 굳게 닫힌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용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할 수 없기에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용서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세상 기준의 ‘유책’ 이상을 보시는 분입니다.
먼저 나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인정하며 자백해야 합니다. 내가 온전한 피해자이며 희생자였는지 하나님 앞에 정직히 서십시오. 선택과 결정의 순간, 사안이 진행되는 모든 순간에 하나님과 함께했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습니까? 한편,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가운데는 반복되는 문제와 상처가 있습니다. 혹 ‘하나님도 이 문제(사람)는 해결하실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한편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용서는 미래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용서는 없던 일로 하거나 그냥 덮어 두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과 관계와 상처를 모두 하나님께 온전히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상대방과 상황만이 아니라 나의 내면과 외면 모두를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아픔으로 하나님께조차 방어적이고 폐쇄적으로 닫아 두었던 그 영역을 열어 드리십시오. 하나님이 상황과 관계 가운데 마음껏 일하시도록 영역과 주권을 내드리십시오. 사랑과 용서는 하나님의 주권에 ‘나와 너’를 온전히 맡기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나는 용서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❶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❷ 주님의 능력과 주권을 참으로 신뢰하고 있습니까?
용서하지 못하는 영혼, 굳게 닫힌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용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할 수 없기에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❶ 관련 설교 – 2022 변화산 6. 용서 구하기
우리는 종종 자신을 피해자로 생각하며 점점 영혼이 시들어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늘 ‘누구 때문에’라는 수식어를 달고 사는 사람은 건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늘 희생자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다른 사람의 상황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주기도문에 보니, 아주 심각한 일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지 못하는 영혼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용서할 줄 모르는 영혼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고도 남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들에 대한 용서와 관대함, 공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실제로 경험했는지 보여 주는 시금석이다.”
J. D. 그리어, 『기도 먼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심을 믿으면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쉬워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죄 사함의 은혜를 경험하고 고백할 때마다, 우리도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이 기도를 가르쳐주신 이유는 용서가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부분의 가장 심오한 뜻은 이것입니다.
만일 용서가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굳이 이런 기도를 가르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 우리가 이미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용서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죄의 문제는 단순히 환경을 극복하는 문제, 그리고 외적인 경험 이상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희생자가 아니라, 죄를 지은 죄인이요 가해자였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기도할 때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요청하는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❷ 관련 칼럼 – “연진아!” 복수 앞둔 <더 글로리> 문동은에게, 이대웅 기자, 크리스천투데이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52499
끔찍한 학교폭력 피해자 문동은(송혜교·아역 정지소)의 가해자 박연진(임지연·아역 신예은) 일당을 향한 복수극,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에서도 ‘용서’는 일말의 고려 대상도 아니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문동은은 학폭 신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퇴한 후
인생 20여 년 전부를 가해자들에 대한 ‘완벽한 복수’를 위해, 한땀한땀 치밀하게 설계하고 준비한다. 이런 ‘빌드업’ 과정이 공개된 시즌1의 주 내용
여기서 ‘기독교적 용서’와 ‘교회’는 영화 <밀양>이 그랬듯 (물론 오해한 것이지만) 하나의 ‘양념’처럼 등장한다. 가해자 중 한 사람인 이사라는 대형교회 목회자 딸이자 중독 상태인 ‘약빨’로 작품활동을 하는 화가로 등장한다.
이사라는 17년 만에 문동은을 만난 자리에서 “너한테 한 짓 다 회개하고 구원받았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기독교인들의 ‘말뿐인 회개’, ‘값싼 구원’은 이미 클리셰(Cliché, 진부한 표현)가 돼 버렸다.
이성과 감정을 넘어선, 용기와 희생이 담긴 ‘원수 사랑’과 ‘용서’라는 가치가 처절하게 외면당하는 시대다. 시청자들도 피해자의 ‘사적 복수’를 열렬히 응원한다. 대리만족 또는 정의구현의 심정일 것이다. “넌 벌 받아야지. 신이 널 도우면 형벌, 신이 날 도우면 천벌”이라는 동은의 말에, 시청자들은 문동은처럼 “되게 신난다”.
드라마처럼 가해자들에 대한 ‘공적 처벌’이 피해 규모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거나 없는 등의 사회적 이유도 있다. 개인주의가 팽배해진 사회에서 ‘잘해주면 호구 된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등의 구호도 난무한다. 삶이 망가진 피해자들에게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는 “너무 페어플레이 같은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심지어 “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명령하셨다. 기도를 가르치실 때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주기도문)”를 넣으셨다.
하긴 용서가 쉽고 당위적이며 순리에 맞는 것이라면, 굳이 예수님께서 이렇게 강조하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용서, 왜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❸ 관련 설교 – 2022 변화산 6. 용서 구하기
[김성권 장로 묵상]
2차 세계대전 당시 여인들의 죽음의 수용소로 잘 알려진 독일의 라벤스부르크 처형장에서 발견된 기도문이 있습니다. 라벤스부르크 수용소는 오랜 시간에 걸친 중노동, 혼잡하고 쥐가 들끓으며 난방이 되지 않는 건물, 극소량의 식사, 그리고 잔인한 경비병. 몸이 허약하거나 말을 듣지 않는 죄수들을 처형하는 가스실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곳, 라벤스부르크에서는 모두 9만6천여 명의 어린이와 여성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악의와 증오. 어둠과 공포만이 판을 치는 절망의 땅에서도, 이렇게 누군가 하나님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드렸던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출처: 블로그 중, http://blog.daum.net/altcosmos/8560778)
* ‘용서를 비는 기도’(라벤스부르크 수용소, 누군가의 기도문)
주여,
선의를 가진 사람들뿐 아니라 악의를 가진 사람들까지 기억해 주소서.
그들이 저희에게 부여한 모든 고난만을 기억하지 마시고
그 고난으로 인해 저희가 맺은 열매도 기억하소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신의를 지키고 스스로를 낮추며 용기를 잃지 않고
친절을 베푼 것은 이 고난이 맺어 준 열매입니다.
그들이 심판대 앞에 설 때 우리가 맺은 이 모든 열매들로 인해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아멘.
혹 ‘하나님도 이 문제(사람)는 해결하실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한편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❹ 관련 예화 – 『팀 켈러의 용서를 배우다』, 팀 켈러, 두란노
“당신이 복음을 믿으면서도, 그러니까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값없는 용서로 구원받았다고 믿으면서도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면, 이는 최소한 당신의 삶에서 복음의 실제 효과를 막고 있다는 증거다. 또는 당신이 복음을 아예 믿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경우든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으면 영적 옥살이를 자초한다.”
용서는 없던 일로 하거나 그냥 덮어 두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과 관계와 상처를 모두 하나님께 온전히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상대방과 상황만이 아니라 나의 내면과 외면 모두를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것입니다.
❺ 관련 기사 – [크리스천의 미덕] 용서와 화해, 이지현 기자, 국민일보
70대 서윤범 할머니는 1991년 서울 여의도 광장 자동차 질주 사건으로 여섯살된 손자를 잃었다. 손자를 거의 혼자 키우다시피 한 할머니는 처음엔 도저히 범인 김씨를 용서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남편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며느리마저 암으로 고생하다 숨지는 불행이 겹쳤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용서와 분노 사이를 오갔다.
훗날 할머니는 ‘일 만 달란트 빚진 자와 일 백 데나리온 빚진 자'(마 18:23∼34)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는 김씨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그 역시 불쌍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할머니는 김씨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아침마다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 후 할머니는 평생 갇혀 지내온 분노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은 ‘용서’이다. 용서는 참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용서를 경험하면 자유의 문이 열린다.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평안과 관용, 자비가 샘솟듯 밀려오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은 사랑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만이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심리학자들은 용서하지 못할 때 생기는 감정의 쓴 뿌리는 결국 인체를 산성화시켜서 효소의 활성도를 떨어뜨리며 각종 병원균에 대한 저항력도 감소시켜 병적인 체질로 만든다고 분석한다. 즉 평생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심을 품고 살아간다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사람은 바로 자신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용서와 화해란 어떤 것일까. 정태기 크리스천 치유상담 연구원 원장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후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또 우리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평안을 얻는다."고 말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https://news.kmib.co.kr/article/viewDetail.asp?newsClusterNo=01100201.2007090310000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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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서란
내게 잘못을 저지른 타인을 선한 마음으로 이해하고 잘못을 덮어주는 행위로 과거에 갇힌 나를 꺼내 미래로 나아가는 진정한 용서를 통해 평화로움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베푸는 이타적인 마음인 동시에 자신에게 베푸는 사랑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죄인들의 허물과 죄를 용납하고 없애는 것 뿐 아니라 그 용서의 대상을 완전히 새롭게 하여 의로운 상태로 만드는 것까지 포함한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행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사랑입니다
용서는 미래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건강한 영혼은 용서받음과 용서함의 은혜를 모두 누립니다.
2. 기도가 필요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영혼, 굳게 닫힌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용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할 수 없기에 “기도” 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를 통해 용서의 능력을 구하여야 합니다.
먼저 나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인정하며 자백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한편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라.“(시편32:5-6)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4:32)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상황과 관계 가운데 마음껏 일하시도록 영역과 주권을 내드리십시오 사랑과 용서는 하나님의 주권에 나와 너를 온전히 맡기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용서함으로 인하여 죄를 사랑으로 사하여 줌으로 화평과 평화가 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용서하게 하시고 사랑으로 죄를 덮게 하여 화평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할 수 없기에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용서는 내 힘으로 할 슨 없는 것은 알았지만 기도해야 함은 망각하고 살았습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그 사람, 그 관계~
지금 자유롭고 평안함은 하나님이 주셨음을 압니다.
그럼에도 세상적 기준과 가치, 아니 어쩌면 유교적인 테두리에 차맞히는 기독교인의 도리로 가끔 죄책감이 생깁니다.
혹시 다 잊은 지나간 일이라고 말하지만 은폐하듯 덮어 둔 문제는 아닐까 살짝 걱정도 됩니다.
하나님!
아빠랑 엄마랑 친구랑 대화하듯이 하나님과 그렇게 지내고 싶습니다.
어린 아이같은 순수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는 격식이나 가식, 체면없이 속얘기 있는대로 하고 싶습니다.
용서하는 것도, 용서받는 것도, 그 어떤 일이라도 기도로 하나님의 뜻에 조율하는 딸로 삼아 주소서.
마태복음 6:11-12, 14-15.
말씀 들으며 생각해보니
넓은 세계로 온 것같아 감사했습니다.
용서.
용서와 잊음. 헐~~
용서의 기됴를 잘못했습니다.
용서하겠다고 선포하고 난후에도
죄에 빠진 못난 것도 내탓이라면
자책과 후회하고 또 불쑥 후회하는 일은
자유롭지 못하며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죄의 줄을 잡고 있는 일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만 믿고
성령님께서 용서의 도음을 청합니다.
잊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일이
용서가 아니네요.
40년이 넘은 죄악의 사슬을
깨끗하게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중요한건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고 뻔뻔스럽다는 것이지요.
그 소관은 주님 주권하에 있으니
그저 불쌍히 여겨 주시고
앞으로의 제 인생을 온전히 주께
맡기고 용서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와
오늘의 말씀을 도전하고
내 삶이 되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함께 하신다면서 그럼 왜? 라고 토를 다는 우를 범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방법을 외칩니다. 이해가 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놓치는 겁니까?
깨닫고 알게하시고 순간순간
하나님 손을 놓지 않도록 역사하옵소서.
오늘 하루 주님 손을 놓치지
않도록 정신차려서 살게 인도하옵소서.
깨달음이 넘쳐 완전한 신뢰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참지혜를
원하고 필요합니다.
내려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