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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에서 만나는 광야”

창 12:10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명령에 따라 가나안에 정착했습니다. ‘가나안’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이라는 수식어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들어간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기근’을 만납니다. 불행 끝, 행복 시작일 것 같았던 약속의 땅에서 기근을 만나다니, 이해하기 어렵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삶에 ‘기근’이 찾아옵니다.

“기근이 없는 가나안은 없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 절반이나 광야였던 것도 모자라, 심한 기근까지 들었습니다. 얼마나 맥이 빠집니까? 그런데 성경을 유심히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땅이 비옥하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가치로 기름지리라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축복과 사람이 받고 싶어 하는 축복의 ‘괴리’ 속에서 믿음의 여정은 시작됩니다. 기근을 만난 이후에도 아브라함의 삶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마엘로 대표되는 가족사의 비극,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 사라의 죽음 등. 그럼에도 왜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축복의 사람이라고 생각할까요?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곳곳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과 후손에 대한 축복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받을 축복은 무엇일까요?

축복의 출발점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창 11:30)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차지할 후손을 주시는 과정입니다. 아브라함이 선택받은 이유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택함 받은 이후에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25년이나 더 기다렸습니다. 이 긴 시간은 더 이상 인간적인 방법이 통하지 않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능성을 0%로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아브라함을 ‘nothing’으로 만드셨습니다. ‘nothing’이 되는 이 광야의 시간은 축복으로 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것은 자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주신 것은 그가 신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믿음에 달려있다면 하나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일을 반드시 행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를 용납하시고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의지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이 더욱 귀합니다. 인생에서 만나는 광야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품고 기다리는 장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가장 크게 배우고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요?
결단해 봅시다.


추천도서

『존 비비어의 광야에서』
존 비비어 저, (두란노서원, 2019.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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