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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용서하고 믿어줘야 하나요?

행 11:24-26, 15:36-41

사역의 시작에는 사연이 있다!

사도행전 9장 회심 이후, 사울은 뜨거운 마음으로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 그를 보고 ‘유대인’들은 당혹스러웠습니다.(행 9:22) ‘여러 날’이 지나자 이들은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하기까지 합니다.(행 9:24-25) 그러나 사울은 제자들의 도움 덕에 예루살렘으로 피신합니다.  ‘여러 날’은 단순한 ‘날’이 아니라 ‘오랜 기간’입니다.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기간은 3년이었고, 그 사이 아라비아를 지납니다. 이곳에서 사울에게 제자가 생겼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났으나 사도 바울은 여전히 배척을 당하며 결국 다소로 보내집니다.

이후 그런 사울을 사역의 현장으로 이끌어내는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10년 전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에 의해 배척 당했으며, 초대교회가 성장을 이룰 동안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던 사울을 바나바가 기억하여 사역의 자리에 세운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바나바를 ‘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행 11장 24절) 바나바는 사람들과 갈등을 만들지 않았고, 자신을 과시하기보다는 주변의 좋은 사람들을 드러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만나는 바나바의 첫 모습은 사도행전 4장으로 올라갑니다. 당시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것을 가져와 나누며 돕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바나바는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의 순종하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단지 쓰임 받는 것이 기쁨입니다.

믿어준다는 것, 그리고 용납한다는 것은. . .

‘용납’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가 ‘사울’을 용납했기에 ‘바울’이 ‘사울’이 되지 않았을까요? 죄인된 우리를 용납하셔서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도 떠오릅니다. 성경 안에서 바나바의 존재감은 사울에 비해 미약합니다. 그러나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위대한 ‘사도 바울’이 존재할 수 없지 않았을까요?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여행을 함께 할 사람을 택하는 문제에 있어 ‘마가’를 두고 의견이 갈렸습니다. 유추하기로는 선교의 어려움에 대열을 이탈한 마가를 사울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용납했던 것과 같이 마가를 용납합니다. 만일 바나바가 마가를 용납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마가는 마가복음의 저자이며,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가의 다락방 주인으로 추측됩니다. 용납하기 쉽지 않았지만, 결국 마가를 용납한 바나바로 인해 지금 우리가 ‘마가복음’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요? 또한 바나바가 포기하지 않았기에 결국 바울과 마가의 관계도 회복됩니다. 바울은 옥중서신에서 가장 보고싶은 사람으로 마가를 지목하기도 합니다. 용납함으로 위대한 인물들을 만들었던 바나바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사람을 믿지 못해 모두를 잃는 것보다, 믿음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한 사람을 얻는 것이 훨씬 복되구나!”


오늘 말씀을 통해 가장 크게 배우고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요?


추천도서

『바나바처럼』
존 슬로안 저, 마영례 역(세움과비움, 201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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