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요1:43-51
거울 신경세포
인간의 뇌에는 남들의 행동을 따라하게 하는 ‘거울 신경세포’(mirror neuron) 라는 특수화된 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우리는 지금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서 삶에 큰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친구따라 강남간다’ 라고 생각해 볼 수 있죠. 오늘 말씀 가운데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어났습니다. 바로 빌립과 나다나엘입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에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소개했고, 나다나엘은 빌립의 인도함으로 그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공식이 아닌 고백
예수님과 빌립의 만남,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의 만남, 이 두 만남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이 찾아온 경우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설명할 수 없는 ‘섭리’ 에 의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을 만나게 된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고백’ 으로 수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계획하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빌립은 자신이 의도를 가지지 않았지만, 주님이 갈릴리로 가시는 ‘계획’ 가운데 있었고 반면에 나다나엘은 율법에 정통하며 메시아를 기다리던 경건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보기를 갈망하던 의지를 가진 자였습니다. 그랬던 그에게 빌립의 증언과 설명으로 그는 주님께로 ‘인도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의지인가? 아니면 예정인가? 라는 교리적 공식 상에서 우리는 이 두 만남에 대해 의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문에 대한 해답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빌립이든 나다나엘이든 이제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시는 인생
나다나엘은 ‘바돌로매’ 와 동일인입니다. 요한복음에서만 바돌로매의 이름 대신 ‘나다나엘’ 이라 지칭하고 있죠. 나다나엘은 오늘 본문을 통해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에 능통했고 또 하나는 선한사람 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두 가지 요소가 오히려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따르는데 방해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율법에 정통했기에 빌립의 설명에도 그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며 반문하게 만들었고, 또한 선한 사람으로서 그가 가진 믿음과 확신을 따르는 성정으로 오히려 메시야의 오심을 전하는 빌립의 말에 ‘자기확신’을 발동시켰습니다. 그렇다면 빌립은 어떤 포인트에서 주님을 따르게 된 것일까요? 율법에 능통함도 아니고 선함도 아닌 ‘주님이 빌립을 알고 계셨다’ 는 점이였습니다. 나를 아시는 주님 앞에 나의 확신은 여지없이 깨어집니다. 그리고 그 깨어짐이 진정한 믿음의 ‘시작 점’ 인 것이죠.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 필요했던 것은 성경적 지식도 아니였고, 나의 선함도 아니였습니다. 그저 주님이 나를 아시고 나를 만나주신 것 뿐입니다. 이번 한 주도 주님이 아시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가장 크게 배우고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요?
추천도서
『그리스도인의 성화 : 두 번째 만남』
김완섭 저 (기독교신앙회복연구소, 2019.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