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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누구냐?

요 1:19-28

어떤 맘이었을까?

세례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혜성과 같이 나타난 존재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는데, 세례요한은 뜬금없이 ‘회개’를 가르쳤습니다. 율법을 지키느냐 마느냐가 죄의 유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라고 선포했습니다. 요한의 이러한 선포는 유대 공동체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유대인 공동체의 핵심이었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는 것보다, 그 율법을 따르므로 자신들이 누렸던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위해 세례요한을 그들의 공동체에서 배제시켰습니다.

여기에서 ‘공동체’에 대한 물음을 던져 보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교회는 ‘그리스도 중심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공동체가 주인이 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공동체는 우리의 마음이 맞는 사람이거나, 우리의 마음에 형제와 자매들을 맞추어가려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은 ‘우리의 이상’을 실현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의 나라에 ‘함께 참여’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만일 바리새인들이 세례요한을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끌어 가는 공동체의 형제자매로 보았다면, 좀 더 우호적으로 그를 대하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세례요한을 보면서 조금은 더 기쁜 마음으로 대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얼마든지 열심히 희생하고,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자기 사랑’에 근거한다면, 자신이 꿈꾸는 공동체와 자신의 생각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면, 사실 그 모든 교제와 섬김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욕망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자신의 열망을 채워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공동체가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됩니다. 함께 했던 공동체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원수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본 회퍼는 말합니다.

‘내 꿈이 깨어지는 곳이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 내가 중심이 아니라, 나와 타인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사랑은 ‘나의 욕망’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이 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라!” – 생각나는 겸손

진정한 사명자의 모습은 겸손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은 ‘소리’라고 말했습니다. ‘소리’란 무엇입니까? 분명히 들리기는 하는데 정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들리는 것으로 존재를 드러내지만 그 기능이 다하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명자는 ‘사명을 다하면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또한 사명자의 모습에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복된 일은 ‘그 일을 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세례요한은 잠시 소리로서 존재하다가 사라졌습니다. 소리를 내다 박해를 받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소리다!”


오늘 말씀을 통해 가장 크게 배우고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요?


추천도서

『예수를 입는 시간』
켄 시게마츠 저, 정성묵 역 (두란노서원, 201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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