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처럼 기쁨으로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기쁨도 훈련할 수 있다.
기쁨이 어떻게 성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명확하게 답할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좋은 성품의 사람의 삶에는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사도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감옥에서 그가 쓴 옥중서신을 보면 ‘기뻐하라’고 계속해서 권면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실제 바울은 감옥에서 기뻐했고, 찬양했고,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빌 4:11-12을 보면 기쁨의 성품을 위해 배우고, 익히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환경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환경을 지배해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지배당하지 않고 지배하는 힘
기뻐하는 사람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는 변하는 환경이 아닌, 변하지 않는 주님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의 본질에 ‘God First’의 믿음이 있으며, 그 가치를 따라 살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죠.
또한 기뻐하는 사람은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은 우리를 참 고통스럽게 만들죠. 그런데 그 갈등이 필연적으로 생겨나기에 문제입니다. 선거철에 신문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이 다른지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빌립보서 4장 2절 말씀을 보니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한 명은 ‘유오디아’이고 한 명은 ‘순두게’입니다. 이 두 사람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같은 생각을 품도록 권합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이 함께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죠. 이는 다른 표현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사람들과 어떤 관계성을 맺어갈 것인가는 우리가 어떤 마음을 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원수라고 할지라도 우리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있다면 그를 용서하고 품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흥미로운 사실은 그러한 결단과 행동이 불러오는 결과로, 실로 놀라운 일들이 펼쳐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뻐하는 사람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 염려는 없애는 비결은 ‘염려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이 결심을 통해 나타나는 우리의 행동은 염려거리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물질에 관한 염려도 그렇습니다. 가난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고 믿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 “하나님께서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약속에 염려를 맡길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즐거운 일 보다는 힘들고 희생하는 일과 더욱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쁨은 희생을 통해 찾아옵니다.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대개 받는 것 보다는 주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죠.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가정에 기쁨이 넘치겠습니까? 자신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요구하는 가정일까요? 아니면 누군가를 끊임없이 덮어주고 희생하는 사랑이 있는 가정일까요? 사랑이란 “사랑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희생적인 성품은 곧 고갈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속적인 은혜로 충전되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기쁨의 성품은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훈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드는 것,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고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이런 성품의 훈련을 받아 기쁨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가장 크게 배우고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요?
결단해 봅시다.
『기쁨을 더 풍성하게 하라』 화종부 저
(두란노, 2016.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