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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죄인인가요?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 3:9-18)

피한다고 죄가 없어지진 않습니다.

사람들은 ‘죄’에 관한 문제를 직면했을 때 불편해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이 죄에 대한 원색적인 표현을 지양하고 우회적으로 표현함으로 듣는 회중들로 하여금 덜 불편하도록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본질적인 신앙에서 벗어나게 되고, 가장 명확하고 선명한 복음을 설명할 길을 잃어버리게 되죠. 여기서 드는 의문점 한 가지는, 우리는 왜 ‘죄’에 관한 문제를 회피하고 싶어 할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임에도 의인인척 살아가려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죄를 밝히 드러내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일종의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아주 명확하고 단순하게 선언합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하지만 명백한 진리 앞에, 우리는 때때로 우리 안에 죄들을 숨기고 덮기에 급급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의를 강력하게 주장하거나, 아니면 다른 이들의 치부를 드러내어 자신의 단점을 덮으려 시도합니다. 이런 행동들의 근원에는 일종의 콤플렉스가 작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본인 자신도 죄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가 극복되지 않으면, 이 같은 죄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순 없습니다. 무서운 점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죄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생의 끝은 결국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능력과 복음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채로 죄의 종으로 살아간다면 비참한 절망 앞에 설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히 9:27을 보면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이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에 관한 심판입니까?

이 땅에 살면서 해결하지 못한 죄의 문제와 그 삶에 관한 무서운 심판입니다. 날마다 죄인임을 인정하며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는 인생과 죄의 문제를 회피만 하는 사람의 인생의 끝은 너무나 다릅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루를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루를 죽어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의 시작은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춘추를 해설한 춘추삼전 중에 하나인 ‘좌전’ 양공 편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코끼리는 상아가 있는 까닭에 제 몸을 잃는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코끼리가 죽는 것은 그의 잘난 상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이 없이 그저 잘난 ‘상아’ 만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을 살아선 안 됩니다. 그 순간이 바로 은혜가 단절되는 순간일 테니 말입니다. 은혜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단점과 치부를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약점이 노출된다고 하여 불안해하지도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허물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크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의 한 주간의 삶 속에서도 이런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가장 크게 배우고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요?
결단해 봅시다.


추천도서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
조나단 에드워즈 저 (생명의말씀사, 2017.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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